잔불의 기사

기사들 현대au (6)

약님 2024. 4. 7. 14:22

 

 피도란스는 난장판이 된 거실을 조용히 둘러보았다. 파디얀에게 안긴 채로 잠든 루디카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파디얀은 한 시간 넘게 루디카를 달래다가 어느 순간부터 같이 울더니 지금은 루디카를 끌어안은 채로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다랑은 이유는 모르겠지만 부엌으로 가는 길목에 일자로 반듯하게 누워 있었다. 표정에는 배불리 먹은 사람의 행복감이 가득했다. 지우스는 술을 입에 대자마자 제일 먼저 맛이 가기 시작하더니 끝내는 책상에 머리를 박고 쓰러졌다. 죽었을까 봐 건드리기 무서울 만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한복판에서 회백발의 여자만이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남은 술을 털어 마시고 있었다. 술을 비우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피도란스는 중간부터 속도 맞추기를 포기해 버렸다.

 “그래도 너는 술 좀 마시네. 한 병 남았는데... 우리끼리 마저 다 비울까?”

 이미 있던 술의 절반은 당신이 마셨는데도. 피도란스가 한숨을 쉬며 회백발 여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언젠가는 이 난장판을 치워야겠지만, 치울 마음이 들려면 피도란스도 술기운이 조금은 돌아야 할 것 같았다.

 “다들 나약해 빠져가지고는.”
 “...지우스는 원래 술 잘 못 마셔.”
 “그런 것 같더라. 새끼, 술버릇 한 번 특이하더만...”

 어허, 자작하지 마, 재수 없게. 술을 따라준 다음 자기 잔에 술을 따르려는 피도란스의 손을 회백발 여자가 막았다. 피도란스는 그런 회백발 여자를 반쯤 경외심이 담긴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오늘 이 사람이 스스로 따라 마신 술만 해도 족히 세 병은 될 텐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피도란스의 깊은 한숨을 따라, 두 시간 전으로 잠시 돌아가 보자.





 지우스는 대체 어디서 그렇게 많은 술이 나왔는지 도저히 이해하지 못했다. 먼저 다랑이 꺼낸 게 한 병, 파디얀이 지우스의 냉장고와 자기 집 냉장고에 분할해서 쟁여둔 맥주가 여러 병, 302호 여자가 잠시 기다리라며 올라가서는 갖고 내려온 소주까지 합하면 그야말로 한가득이었다. 현대인이란 원래 집에 필수품처럼 알코올을 구비해 놓고 사는 이들이었던가? 술을 그리 즐기지 않는 지우스로서는 혼란스러울 따름이었다.

 “자~ 자~ 자! 첫 잔은 원 샷!”

 파디얀의 술 마는 솜씨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았다. 소주와 맥주, 사이다를 일 대 일 대 일 비율로 섞고서는 잔 위로 휴지를 한 장 덮어서 탁, 하고 흔들어 섞는 솜씨가 아주 비범했다. 쓸데없이 멋진 손짓으로 휴지를 날려 보낸 파디얀이 나서서 건배하고는 기세 좋게 자기 잔을 원샷했다. 지우스는 조심스럽게 한 모금 홀짝이고 말았지만, 살면서 마셔본 술 중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맛있었다.

 지우스가 순수하게 감탄하는 사이, 피도란스가 다 끓은 전골을 상 위로 내왔다. 파디얀의 요리 실력은 몇 번 얻어먹어서 잘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비주얼부터 맛까지 유난히 훌륭했다. 거의 무표정을 유지하던 회백발 여자조차도 꽤 신나 보였다. 다랑은 벌써 신나서 전골 맛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다가, 주변의 비어 있는 잔을 죄다 채워주기 시작하고 있었다.

 가끔은 이런 시끌벅적함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지우스가 남들 눈에 안 보일 만큼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다랑이 이쪽으로 오기 전에 자기 잔에 남아 있던 술을 털어 마셨다.

 그리고 지우스의 기억은 거기서 끊겼다.





 30분 뒤, 루디카가 전골을 뒤적이며 울기 시작했다. 파디얀이 옆에서 달래고 있었고, 다랑도 장단을 맞춰주고는 있었지만 그렇게 큰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새우가 불쌍하지 않아...? 얘네도 여기 들어가려고 열심히 산 건 아닐 거 아냐... 새우도 열심히 살았는데 결국은 여기 들어가게 됐잖아...”
 “루디~! 갑자기 또 왜 울어... 응, 그치... 새우 불쌍하다... 불쌍하니까 내가 새우 하나 까줄게... 아니~! 울지 말고 울보야~ 너 울면 나도 슬프단 말이야~”
 “파디얀 씨! 전골 지인짜 맛있어요~ 국물도 칼칼하고 간이 딱! 된 것이~ 아! 새우요? 새우도 진짜 맛있죠! 어어... 루디카 씨? 왜 울고 계세요? 전골 진짜 맛있는데... 국물도 칼칼하고 간이 딱...”
 “우리는 여기 들어간 새우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새우는 결국 여기 들어갔는데... 새우... 새우 맛있네... 맛있으면 안 되는데... 맛있으면 어떡해? 맛있으려고 열심히 산 건 아니겠지, 새우도...”
 “루디~ 새우도 맛있는 새우가 될 수 있어서 행복할 거야... 아니지! 새우가 왜 중요해! 나한테는 루디가 행복하면 그만인걸~ 자, 자~ 새우 씨, 행복하신가요? 네네~ 행복하답니다~ 우리 루디한테 행복한 기억이 될 수 있어서 행복하대요~”
 “맞아요! 새우가 얼마나 맛있는데요! 아, 아니, 새우가 얼마나 행복한데요! 아, 이것도 아닌가...? 아니, 어쨌든! 루디카 씨! 새우는 괜찮아요! 왜냐하면 새우는... 새우는...! 새우는 맛있으니까요! 아, 이게 아닌데?”
 “새우가 불쌍해... 역시 나한테 먹히는 게 아니었어...”
 “루디~! 알았어~ 다음에는 새우 안 넣을게~”
 “앗...! 하지만 이렇게 맛있는데... 아! 아! 죄송해요! 루디카 씨! 그만 우세요!”

 회백발 여자는 혼자서 술을 들이켜고 있었고, 피도란스는 이 자리에서 아마도 가장 고역일 역할을 맡고 있었다. 즉, 지우스를 상대하고 있었다.

 “피도란스, 좀비를 죽이는 건 살인 행위일까?”
 “글쎄... 아니지 않을까? 일단 실존하는 생물이 아니잖아.”
 “그렇지. 좀비는 보통 영화에서 나오는 생물이고. 영화에서는 그런 윤리적 딜레마보다는 주인공 일행의 생존과 이야기 진행을 위해 필연적으로 좀비를 죽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좀비란 게 인간에게 죽임당하는 걸 목표로 만들어진 가상생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 그렇겠지. 근데 그게 뭐가 문제야?”
 “좀비는 인간을 먹으려는 본능을 가졌고, 좀비에게 물린 인간은 감염되어 좀비의 특성을 가지게 된다는 점에서, 좀비는 인간을 공격하여 죽음에 이르게 할 뿐만 아니라 좀비의 개체 수를 늘려 위험성을 증가시켜. 그러니까 인간은 좀비의 수가 늘기 전에 최대한 빠르게 그들을 죽일 의무를 지니게 되지. 게다가 좀비는 같은 좀비를 공격하지 않아. 좀비가 서로를 공격한다면 좀비의 개체 수가 줄어들어 생존자들의 부담을 크게 줄여주겠지만, 좀비는 절대 자연적으로 사라지지 않고, 인간이 직접 나서서 좀비를 죽여야만 좀비에게 죽임당할 확률을 낮출 수 있지. 많은 창작물에서 좀비는 지능이 낮아서 말을 못 하고, 오직 인간을 먹겠다는 본능에 의해서만 움직이는데... 지능을 활용하는 인간과 좀비의 대결 구도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겠지? 인간이 높은 지능을 활용한다면 소수의 인간도 많은 좀비를 죽일 수 있도록 하는 설정이야. 하지만 이런 설정을 가진 좀비는 얼마 전까지 인간이었고, 인간의 외형을 가지고 있고, 인간처럼 행동해. 그리고 인간에게 죽어야만 하지. 좀비에 대한 윤리적 문제와는 별개로, 좀비에게 가하는 폭력은 인간처럼 생긴 데다 인간처럼 행동하는 생명체에게 가하는 폭력이야. 그러면서도 꼭 죽어야만 하는 설정을 가지고 있으니, 실제로 인간을 죽인다는 죄책감에서는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는...”
 “...그래, 그래. 네 말이 맞는 것 같은데...”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은, 좀비라는 소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청소년들에게 노출하기 꺼려지는 점이 있다는 거야. 아무리 심의 등급이라는 게 있다지만, 요즘 사회에서는 심의 등급이 무색할 정도로 유해 콘텐츠의 노출이 잦아. 내가 애들 가르치는 입장이라서 그런 게 더 신경 쓰이는지도 모르지만, 성인들을 위해 만들어진 콘텐츠가 전 연령대에 거쳐 흔한 밈으로 통용되는 게 조금 거슬릴 때가 있단 말이지...”
 “얘 학원 선생이랬지?”
 “...응. 직업병이 가끔 도져.”
 “두 번 도졌다간 귀 터지겠어. 이봐, 선생 친구. 너도 술이나 더 마셔.”





 그렇게 한 시간이 더 지났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실 모두 통속의 뇌일 수도 있다는 거야. 우리가 통속의 뇌라면 우리가 하늘을 바라봤을 때 보이는 하늘은 사실 실험실 천장일 수도 있는 거고, 그럼 실험실 천장이 하늘색이라서 우리가 보는 하늘이 하늘색으로 보이는 것일 수도 있는 건데, 그럼 하늘을 하늘색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하늘색이 먼저 존재하고 하늘이 나중인 거지? 그럼 우리는 통속의 뇌로서 평생 하늘색인 실험실 천장을 바라보면서 그걸 하늘이라고 여기는 건데 만약 천장이 보라색이었다면 우리는 하늘을 보고 하늘이라고 불렀을까 보라라고 불렀을까? 물론 이건 우리가 통속의 뇌일 거라는 가정하에 세운 의문이지만, 그렇지만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우리는 확실히 통속의 뇌가―”
 “이 새끼 뒷목 치면 기절하나?”
 “안 돼. 죽을지도 몰라.”
 “누구보다 네가 제일 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조금... 살짝 치면 괜찮을지도.”
 “안 돼요! 폭력은 나쁘잖아요! 그, 그리고 무방비한 상대를 기습적으로 공격하는 것은 명예롭지도 못한 행동이고! 말로 잘 설득할 생각을 해야죠...”
 “얘를 말로 설득하겠다고?”
 “...자신은 없지만! 아무튼 폭력은 나빠요. 그렇죠, 파디얀 씨?”
 “그럼~ 폭력은 나쁘지~ 루디가 울잖아... 루디~ 괜찮아~ 내가 다 혼내줄게... 응, 응... 그치~ 이제 걱정 말고 코 자자~ 자고 일어나면 다 괜찮을 거야~”
 “파디... 파디 나 자는 사이에 어디 안 갈 거지? 안 돼, 괜찮아... 가끔은 폭력도 필요한 거야... 그리고 주먹질하는 파디는 멋있으니까. 안 혼내줘도 되니까 어디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그치? 루디가 그랬어... 가끔은 폭력도 필요한 법이래... 응, 응... 루디 말이 다 맞아! 그래~ 나 어디 안 가! 내가 루디 두고 어딜 가겠어~”
 “어어...? 파디얀 씨? 루디카 씨? 어, 그러니까... 가끔은 폭력도 필요하다는데요? 아니, 폭력은 나쁜데... 저, 적당히 하면 괜찮을지도요?”
 “들었지? 쳐라.”

 그렇게 해서 지금 이 난장판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피도란스가 초췌한 표정으로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회백발 여자는 여전히 멀쩡한 기색이었다. 결국, 마지막 병까지 모두 비워버린 뒤, 회백발 여자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숨 자고 치우자. 이 바보들도 어차피 다 자는데... 뒷정리를 우리가 독박 쓸 필요는 없잖아?”
 “그렇긴 한데...”

 피도란스가 살짝 몽롱해진 기분으로 자기 잔에 남아 있던 마지막 술을 모두 마셨다. 

 그리고 피도란스의 기억도 그게 마지막이었다.





 지우스는 지끈거리는 수준이 아니라 깨져버릴 듯이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아직 해도 안 뜬 새벽이었다. 옆에서는 피도란스가 바른 자세로 누워서 평화롭게 자고 있었다. 대체 몇 시지? 시간을 확인해 보니 새벽 4시 50분이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비틀거리며 거실로 나가 보니 술판은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심지어 전골을 끓인 냄비까지 깔끔하게 설거지 되어 있었고, 남은 음식은 밀폐용기에 담겨 냉장고에 얌전히 보관되어 있었다. 국물 한 방울 흘린 자국 없이 깨끗했다. 파디얀과 루디카, 다랑, 302호 여자는 다들 어디로 간 건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201호와 203호에서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건 지우스가 기억하기로는 피도란스의 오랜 술버릇이었다. 피도란스는 옛날부터 술을 잘 마시는 편이었지만, 혹시라도 필름이 끊겼다 하면 어떤 난장판이든 깔끔하게 정리하고 다들 택시 태워서 집에 보내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러고는 다음 날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는 게 가끔은 조금 무섭기도 했다. 오늘도 여전하군. 아무튼 그 피도란스마저 이렇게 될 정도면 어제 진짜로 많이 마셨다는 소린데... 지우스의 머리에 익숙한 지끈거림이 찾아들었다.

 그리고 또 눈에 띄는 것은, 책상 옆 책꽂이가 묘하게 허전해 보인다는 점이었다. 평소와 비교하면 아주 미묘한 차이였지만, 타칭 편집증 환자인 지우스가 그 차이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우스가 몇 달간 아침마다 붙잡고 있던 노트 한 권이 사라져 있었다.

 “하...”

 굳이 범인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릴 필요도 없었다. 군데군데 끊겨있는 희미한 기억에 따르면, 어제 술자리에서 마지막까지 멀쩡해 보였던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으니까.

 지우스가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린 뒤 비장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했지만... 예상보다 빠른데. 그래도 회피할 수 없었다. 이제 드디어, 오랫동안 속에 묵혀둔 이야기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

 ...일단 해 뜨고 나서. 지우스가 갑작스럽게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끼며 화장실로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