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디루디 대학생au
오전 8시 58분. 1교시 전공필수 과목 강의실에서는 갓 죽은 시체들의 기운이 풍겨왔다. 지우스는 아무리 봐도 사약처럼 보이는 것을 5초에 한 모금씩 쪽쪽 빨면서 노트북을 끊임없이 두들기고 있었다. 맨 뒷자리에 앉은 다랑은 정말로 죽은 듯이 책상에 머리를 박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지우스의 옆자리에 앉은 피도란스는 그나마 눈은 뜨고 있었지만, 눈에 묘한 광기가 서려 있어서 오히려 더 무서워 보였다.
8시 59분, 저 멀리서부터 다급한 발소리가 들렸다. 강의실에 있던 이들 대부분은 누가 뛰어오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았다. 1교시 이전에 뛸 기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뻔했으니까. 곧 파디얀이 루디카를 옆구리에 낀 채로 닫힌 문에 돌진했다. 그러고는 모두의 이목이 집중될 만큼 큰 소리를 내며 문을 열고, 원래부터 그렇게 박력 있게 등장할 계획이었던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애썼다.
방금까지 뛰어온 사람의 활기를 주변에 흩뿌리며, 파디얀이 발랄하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
안타깝게도, 그 인사에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파디얀의 기분 좋은 인사에 대답하기 싫은 사람은 없는 모양이었지만, 섣불리 대답했다가는 ‘좋은 아침’이라는 그―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관형어와 명사가 만나서 만들어낸 끔찍한 혼종에 동의하게 될까 봐 두려운 듯했다. 피도란스만이 간신히 입꼬리를 끌어올린 미소로 답을 대신할 뿐이었다(그조차도 말로 대답할 용기는 없는 듯했다).
파디얀은 마치 지금 강의실이 시체 밭 꼴을 하고 있는 게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더없이 씩씩한 태도로 척척 걸어들어와 맨 앞자리에 루디카를 내려놓고 그 옆자리에 앉았다. 루디카는 그때까지도 눈을 뜨지 못한 채로, 강의실에 죽어가는 사람의 분위기를 한 사람 더했다.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 됐다.” 지우스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뱉었다.
루디카는 눈을 떴다. 신기하게도, 강의실이었다. 잠들기 전에도 강의실이었는데. 그렇다면 강의실에서 밤을 새운 것일까? 그건 아니었다. 기억은 희미하지만, 분명 자기 침대의 푹신함을 느꼈었다. 심지어 어느 때인가는 밥이 입에 들어온 것 같기도 했다. 제대로 씹어서 넘겼는지는 불분명했지만.
잠은 깼지만, 루디카의 눈은 여전히 계속 뜨여 있기를 거부했다. 어쩐지 전속력으로 달리는 차에 연달아 두 번 정도 치인 기분이었다. 어제는 뭘 했었지? 과제를 했다. 그럼 그제는 뭘 했었지? 전혀 놀랍지 않게도, 과제를 했다. 여기까지 자각하고 나니, 그냥 계속 자고만 싶은 욕망이 이천 배쯤 증가했다.
“거기 자는 학생 좀 깨워라.” 그때 교수님의 나긋한 음성이 강의실에 울려 퍼졌다.
한둘이 아닌데요. 강의실을 돌아본 지우스는 교수님의 말에 이렇게 대꾸하지 않기 위해 정신력을 끌어모았다. 그는 형식적인 손짓으로 다랑의 어깨를 붙잡고 가볍게 흔들었지만, 지우스의 생각에 다랑을 깨우려면 이런 가벼운 자극이 아니라 강령술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아마도 이 교실에서 제정신을 부여잡고 있는 사람은 파디얀과 지우스 둘뿐인 듯했다. 피도란스는 분명히 눈도 뜨고 있었고 곧은 자세로 앉아 있었지만, 공허한 눈을 보니 정신이 외우주 은하로 진출하고 있는 게 명백해 보였다.
물론 파디얀은 다른 사람에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루디카를 깨우는 것에만 집중했다. 파디얀은 어느새 루디카의 상반신을 일으켜 세운 뒤,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준 뒤 어깨를 힘차게 두드려주었다(그 충격으로 루디카는 거의 책상에 처박힐 뻔했지만, 그 여파로 잠은 확실히 깬 듯했다). 루디카가 파디얀에게 눈총을 주었지만, 파디얀은 교수님의 말을 경청하는 데 너무 심취해 있어서 눈치채지 못한 척했다.
루디카가 궁시렁거리며 수업 자료 피피티를 켰을 때쯤, 파디얀이 작게 접은 쪽지를 루디카 쪽으로 밀었다(세상에는 카톡이라는 발달한 문명이 있지만, 파디얀은 직접 손으로 적어서 전달하는 쪽지가 더 낭만적이라고 생각하는 부류의 사람 중 한 명인 듯했다).
루디 오늘 축제 갈 거지?
루디카가 가방에서 볼펜을 꺼내서 쪽지 끄트머리에 끄적끄적 적었다.
아니 자고 싶은데.
루디카는 그렇게 적으면서도 파디얀이 어떻게 반응할지 훤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결국은 파디얀의 뜻에 따르게 될 것이라는 것도. 알면서도 어쩐지 한 번에 시원하게 오케이를 해 주기는 싫은 것이다. 루디카가 축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것도 한몫했고.
아 왜~ 가자가자가자가자 애들도 다 온대!
그렇지만 루디카는 또한 이 시점에서, 파디얀을 따라 축제에 가겠다고 동의한 사람은 한 명도 없음을 알았다. 단지 파디얀의 가끔은 도무지 참아주기 힘든 아침형 인간 에너지라면 모두를 끌고 올 수 있으리라 확신할 뿐이었다. 지우스는 그냥 시체인 상태 그대로 끌고 오면 될 테고, 피도란스는 점심을 2인분쯤 먹으면 금세 회복해서 날아다닐 것이다. 다랑은 갈래? 하고 말만 해도 온 수업을 다 째고 와서 앞장서리라.
재미없으면 네가 책임져.
그 말을 끝으로 쪽지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대신 자신만만한 표정을 띄운 채 한 손으로 따봉을 만들어 보이는 파디얀이 있을 뿐이었다. 루디카는 흥, 하는 애매한 소리로 대답을 대신한 채 다시 몰려오는 졸음에 몸을 맡겼다.
축제는 당연히, 루디카로서는 딱히 기대한 적도 없었지만, 재미가 없었다. 제아무리 파디얀이라 해도 재미없는 축제를 재미있게 탈바꿈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나마 트럭에서 파는 닭꼬치를 하나씩 사서 위장에 집어넣은 뒤로는, 최소한 다들 잠은 깬 상태로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러나 루디카가 기억하기로는 닭꼬치를 리드미컬하게 씹는 본인 치아의 리듬이 오늘 하루 경험한 모든 축제 체험 중에서 가장 흥미로웠다. 어쩌면 루디카가 세상 모든 일에 끔찍하리만큼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라서일지도 모른다.
이 부스 저 부스를 돌아보며 축제를 즐기고자 나름의 발악을 다 마친 뒤에, 결국 오늘 하루를 재미있었던 기억으로 미화하려면 뇌를 알코올에 적셔서 스스로 최면을 걸어야 한다는 사실에 모두가 동의했다. 즉, 술을 마실 시간이었다. 다랑과 피도란스는 눈을 빛내며 신나 했지만, 루디카는 어쩐지 그마저도 별로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어쨌든, 술자리는 신나는 분위기로 이어졌다. 지우스는 술자리가 막 시작될 즈음 오토바이를 타고 등장한 헬멧 쓴 사람과 무언가 심각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피도란스는 혼자서 테이블에 놓인 술의 거의 3분의 2를 혼자 마셨는데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저 신나 보였다. 피도란스는 다랑을 상대로 끊임없이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는데, 다랑 또한 자기 이야기만 하는 중이었음에도 왠지 그 대화는 문제없이 잘 이어지는 중이었다. 파디얀은 자리에 없었다.
루디카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파디얀이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어쩐지 취기가 확 올라왔다. 아직 눈물은 나지 않으니 취한 건 아니겠지만(루디카도 우는 게 본인 술버릇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정신없는 사이에 술이 꽤 들어간 듯했다. 아무튼, 루디카는 지체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디얀이 어디를 간다면 자기한테 말하고 갔을 텐데, 왜 이제야 눈치를 챈 거지? 시야가 눈물로 점차 흐려졌다. 오 젠장, 취한 거 맞잖아. 루디카가 소매로 눈물을 정신없이 닦았다.
저 멀리 공연장에서는 사회자가 마이크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게 들렸다.
- 9시부터 공연이 시작됩니다.
동시에, 어둑어둑한 골목의 가로등에 불이 켜졌다. 학생들을 위한 식당이 모여 있는 골목이었다. 술기운 탓인지, 루디카는 그 노란색과 주황색의 사이쯤 있는 듯한 불빛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아무도 나서서 루디카를 말리지 않았다. 어쩐지 사무치게 외로워졌다.
- 모두 크게 소리 질러···
관중들의 함성이 루디카의 귓가에 미처 도달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모든 소리가 희미하게만 들려왔다. 어쩌면 소리가 먹먹하게 들리는 지금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루디카는 원래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니까. 가끔은 세상 모든 일을 그런 태도로 대하곤 했으니까. 파디얀마저도 밉게 느껴졌다. 다만 그것은 부정적인 감정보다는,
- 아, 소리가 너무 작은데요.
소유욕에 더 가까웠다고 할까. 언제나 파디얀이 자신을 챙겨 주고, 자신만을 바라봐 주는데도 어쩐지 부족한 느낌. 그럼 내가 바라는 건 뭐지? 루디카는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한 채로 계속 걸었다.
- 네, 네. 좋아요. 그럼 다 같이 큰 목소리로 불러 볼까요.
파디얀의 굳은살 가득한 손가락들이 루디카의 손목을 조심스럽게 감아 쥐였다. 으이그, 울보야. 루디카는 이렇게 말하는 파디얀의 모습을 너무나도 쉽게 상상할 수 있었지만, 그 친숙한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대신, 파디얀은 무언가 다른 말을 했다.
- 둘, 셋. 안녕하세요. 오늘 □□대학교에서 공연하게 되어 정말 영광···
그랬을 것이다. 루디카는 파디얀의 입이 움직이는 걸 보았으니까. 그러나, 그 말은 마침 우렁차게 자기소개를 하는 웬 공연팀의 목소리에 묻혀 버렸다. 루디카는 그 순간, 공연장에 난입해서 돌이라도 던지고 싶은 욕구를 억누르기 위해 타고 남은 재처럼 흩어진 이성을 다 쏟아부어야만 했다. 별다른 반응이 없는 대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던 루디카의 촉촉한 눈꺼풀 위로 파디얀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가벼운 접촉은 눈꺼풀에서 콧등으로, 입술로 내려왔다. 루디카는 자신의 등이 벽에 닿는 걸 느꼈다.
- 자, 그럼 멋진 공연 보여주신···
맞닿은 입술이 떨어지고,
- ···에게 큰 박수 보내주세요.
축제 첫날의 막이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