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디루디 동거
1
“루디이~ 나 머리...”
“말려줄게.”
“아! 또 말 끊었어! 부탁하기도 전에 들어주는 게 어딨어?”
“...싫어?”
“아니~ 부탁하는 재미가 없잖아! 루디는 밀당을 모른다니까~”
파디얀은 그러면서도 아이처럼 맑게 웃으며 루디카의 앞에 등을 보이고 앉았다. 키가 큰 파디얀이었지만, 다리를 모아서 팔로 감은 채 쪼그리고 앉아 있으니 그 등이 꽤 작아 보였다. 그리고 그 뒷모습이 거의 안 보일 만큼 치렁치렁하게 내려온, 흰 사슴이라는 이명에 걸맞은 새하얀 머리카락. 루디카가 말없이 파디얀의 머리카락을 한 줌 손에 쥐었다. 방금 씻고 나온 파디얀의 축축한 머리카락이 루디카의 손끝을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다 하면 루디 머리도 말려 줄게~”
“내 머리... 이미 다 말랐어. 짧으니까.”
“그래? 아쉽네... 다음부턴 내가 먼저 말려줘야겠다.”
루디카는 대답이 없었다. 파디얀의 풍성하고 숱이 많은 곱슬머리를 안쪽까지 꼼꼼히 말리는 데 집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파디얀이 소리 없이 웃었다. 귀여운 루디, 언제나 그랬지. 모든 면에 진지하고 모든 일을 집중해서 처리하는. 그런 모습이 귀엽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루디카의 집중력을 굳이 흐트러뜨리고 싶지 않았다.
“난 루디가 머리 만져주는 게 그렇게 좋더라.”
또다시 대답이 없는 루디카였다. 감동받아서 또 울고 있는 건 아니겠지? 파디얀이 확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으며 기다렸다. 머리카락의 미미한 촉감으로만 루디카를 느끼는 시간. 심장이 근질거리는 기다림의 시간.
드라이기의 바람이 멎었다. 루디카는 파디얀의 머리카락 몇 가닥에 손가락을 감은 채 계속해서 머리를 쓸어내렸지만, 파디얀은 그 주변이 덜 말랐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대답을 회피하듯 괜히 머리카락만 만지작거리는 루디카의 행동이 모든 것을 말해주었으니까.
머리카락은 이미 다 마른 지 오래였다.
2
“그만 울라니까... 뚝! 나 안 죽어!” 파디얀이 살짝 갈라진 목소리로 달랬다.
“...네가 울린 건데...” 루디카의 목소리는 이마에 물수건을 올린 채 누워 있는 파디얀보다도 더 기운이 없었다. 아마 모르는 사람에게 둘 중 아픈 사람이 누구일 것 같냐고 물어보면 고민 없이 루디카를 고를지도 모른다.
“나 아무것도 안 했잖아~ 루디, 진짜 괜찮다니까?”
“겨우살이... 삼켰을 때도... 그렇게 말했잖아...”
어머, 실수. 파디얀이 헙, 하고 숨을 삼켰다. 눈물 자국이 선명한 루디카의 눈에 강렬한 분노의 눈빛이 섬광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겨우살이 때의 기억이 또 떠오른 모양이었다. 이미 파디얀의 몸속에 파고들어 꺼낼 수도 없는 나린기를, 가루로 분쇄해 버리겠다는 듯이 (파디얀의 몸속에 있는 겨우살이에게 화를 내려다보니, 어쩔 수 없이 파디얀을 향해서) 화를 냈었던 그때의 기억.
적어도 그때와 비교하면 지금 상황은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다. 단순한 열병에 불과했으니까.
“하루 종일 기운을 못 차리니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루디카가 울음을 참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파디얀이 지끈거리는 두통을 애써 무시하고 기운차게 말했다.
“금방 나을 거야~ 나으면 같이 장 보러 가자.”
“그런... 사망 복선 같은 말 하지 말고...”
“아! 안 죽는다니까! 미인은 오래 사는 법이에요~ 그래야 세상을 오래 밝힐 수 있거든... 근데, 루디. 어디서 타는 냄새 안 나?”
소매로 눈물을 훔치던 루디카의 눈에 순식간에 총기가 돌아왔다. 고개를 번쩍 치켜든 루디카가 거의 전투에 임한다고 봐도 좋을 자세로 달려 나갔다.
그러고 보니, 루디카가 감기에 좋은 흰죽을 끓인다고 했었지(약 50분 전에). 파디얀이 약기운 때문에 몽롱한 머리를 뒤척이며 생각했다. 우리 울보 또 울겠네...
3
루디카의 방은 언제나 텅 비어있었다. 기사라는 직업 특성상 한 번 집을 나서면 오랫동안 들어오지 않을 때가 많았으니까. 특히 침대는 들여놓고 거의 써본 적도 없었다. 어쩌다 한 번씩 집에 있을 때도 보통은 파디얀의 방에서 자곤 했으니. 상대적으로 집에 있을 때가 더 많은 파디얀이 늘 꼼꼼히 청소했기에 먼지가 쌓이지는 않았지만, 개인 소지품도 거의 없는 방은 늘 허전하다 못해 쓸쓸해 보였다.
방 안에서 눈에 띄는 건 서랍장 위에 놓인 나무 액자 하나뿐이었다. 언젠가 파디얀과 함께 찍은 사진. 파디얀이 씩 웃으며 루디카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고, 루디카는 놀람과 얼떨떨함 그 사이쯤에 있는 모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진이었다.
그 후로는 같이 사진 찍을 기회가 영 없었지. 파디얀이 액자 틀에 쌓인 먼지를 손으로 쓸어내며 생각했다. 루디카가 집을 비운 지 벌써 이 주일째였다.
그동안 파디얀은 시간이 날 때마다 조금씩 루디카의 방을 채워나갔다. 루디카가 좋아하는 것, 루디카가 좋아할지도 모르는 것, 루디카가 좋아해 줬으면 좋겠는 것들로. 창틀에는 작은 화분을 놓아보자. 방 안의 공기를 맑게 해줄 것이다. 화사한 색의 새 커튼을 샀으니 오래된 커튼은 걷어내야겠지. 액자는 먼지를 잘 닦아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올려두고. 침대 머리맡에 귀여운 인형 같은 걸 하나 올려놓는 건 어떨까. 여우 인형이라면 루디카가 보고 웃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방을 돌아보고 있었을까. 문 쪽에서 달칵, 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가벼운 노동에 대한 보상을 받을 시간이 드디어 왔구나. 파디얀이 미소지었다.
“다녀왔어, 루디?”
4
어쩐지 낯선 기분인데. 루디카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뭔지 모를 어색한 기분이 집에서부터 졸졸 따라오고 있었다. 컨디션이 안 좋은 건 아닌데, 어딘가 불편하고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기분... 마치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이라도 제공하는 것처럼, 옷에서는 친숙한 흰색 머리카락이 한 가닥 붙어 나왔다―물론, 루디카의 옷에서 파디얀의 머리카락이 나온다고 해도 그리 이상할 건 아니었지만.
그러나 모름지기 기사란 바쁜 직업이었으며 루디카는 옷이 몸에 제대로 붙어있기만 한다면 그 이상으로 더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었다. 기사가 어떤 족속들인가? 어떤 요소든 간에, 이것이 전투에 방해되는가 말고는 관심 없는 이들이다. 그리고 설령 전투에 방해되더라도 드높은 전투력으로 극복해버리면 그뿐이었다. 루디카는 기분 탓이겠거니 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파디얀 또한 뭔가 이상하다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왠지 오늘따라 소매가 조금 짧지 않나? 불편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옷을 탈탈 털어 보니 손가락에 그리 길지 않은 머리카락 한 올이 감겼다. 흑색과 청색이 미묘하게 섞인 듯한, 한 가닥만으로도 특유의 아름다운 색을 알아볼 수 있는.
이 명백한 힌트를 보고도 정답을 떠올리지 못할 파디얀이 아니었다. 아~ 옷 바꿔 입었나 보다!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어갔을 뿐이다. 루디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리고 그날 저녁.
“파디, 왜 말 안 해줬어... 옷 바뀌었다고.”
“나도 몰랐어~ 입고 나서야 알았지. 불편하진 않았어?”
“겨우 그 정도로... 전투에 지장이 생기진 않아.”
“그래, 그래~ 근데 루디는 어떻게 알았어? 바뀌었다는 거.”
“...안주머니에 내 사진이 들어 있었어.”
“어머. 그래서 감동받았어?”
“...흥.”
5
파디얀이 입에서 무언가를 왈칵 토해낸다. 당연하게도 그 무언가는 진저리나도록 검붉은 피다. 피로 범벅이 된 손을 한 번, 그리고 힘겹게 고개를 들어 루디카의 눈을 한 번 바라본 파디얀이 힘없이 무너진다. 파디, 파디... 부르는 목소리는 파디얀에게 닿지 않는다.
파디얀의 얼굴에 언제나 굳게 자리할 것만 같았던 환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를 낯선 표정이 대체한다. 죽기 직전의 사람들에게서나 보던, 파디얀이 지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순수한 공포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그런 표정을, 네가 왜? 파디얀을 향해 내뻗은 손이 무언가에 가로막혀 더 나아가지 않는다. 쓰러진 파디얀의 몸을 받치고 있던 바닥은 지진이라도 난 듯 무너지면서 파디얀과 함께 저 아래 어둠 속으로...
“루디?” 파디얀의 목소리와 함께 세상이 한순간 하얗게 점멸했다. 다시 훅 잦아든 시야에 멀쩡한 모습의 파디얀이 들어왔다. 침착하지만, 조금 긴장한 듯한.
“...파디.” 루디카는 자기 어깨에 올려진 파디얀의 손을 꽉 붙잡았다. 악몽은 깨고 나서도 뒷맛이 쓰다.
“괜찮아.” 파디얀이 루디카의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루디카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지만, 새벽의 어둑한 빛 속에서도 어렴풋이 보일 만큼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괜찮아.” 파디얀이 했던 말을 나직하게 반복하는 루디카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결의가 깃들어 있었다. 절대로 제 꿈과 같은 상황이 일어나게끔 두지는 않겠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