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

지우와론

약님 2024. 10. 13. 12:33


 은퇴기사라고 해서 이명을 잃는 것은 아니다. 어지간히 불명예스러운 은퇴가 아닌 이상은.

 다만 그의 경우에는 명예롭게 은퇴하는 과정이 영 순탄치 않기는 했다. 이유야 당연히 상식을 벗어난 힘을 담은 그의 양손 때문이다. 사상 지평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오간 지가 벌써 십오 년이니, 일반인 수준의 창의력들 가지고는 더 이상 새로운 말이 나오기도 어려웠다. 그를 놓고 벌어지는 지긋지긋한 각축전, 저열한 설전, 자신을 보는 탐욕스러운 눈길들, 그 모든 것이, 그를 새삼 지치게 했다. 인간으로서,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는 데서 오는 피로.

 담청색 기린, 그대의 힘은 사용하기에 따라 대륙에 너무나도 큰 위협을 불러올 수 있으니, 은퇴한 뒤로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봉함이 옳다.

 그러니 그대의 팔 한쪽을 받아야겠다. 지우스는 그 말이 귓가에 들려오기 전에, 한 박자 앞서 그 문장을 머릿속으로 암송했다. 오늘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맞혔군. 지우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지. 과연 이번에는 어떤 의미로 해석되는지 볼까.

 그러나 그의 그런 태도가 누군가를 답답하게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꼭 팔을 잘라야 하나? 잔인해라.

 ...새까만 닭, 그럼 다른 뾰족한 대안이 있는가?

 그거, 꼭 자르지 않고도 사상 지평을 없애는 방법이라면 있잖아.

 새까만 닭이 그 자리에 모인 기사들을 죽 둘러보았다. 투구에 가려진 눈을 볼 수는 없어도, 모두가 알았다. 그 눈에 제 모습들이 지금 순간 한 번씩은 다 담겼다는 것을. 그리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알고 있는 것이 또 하나.

 기어스를 어기면 사상 지평은 사라진다. 그리고 담청색 기린의 기어스는―

 자원할 사람 있나?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튼, 은퇴기사라고 해서 이명을 잃는 것은 아니다. 지우스 역시 아직은 이름보다 기린이라고 불리는 때가 더 많았다. 파디얀은 제 기분 따라 이름과 이명을 마구 섞어 부르는 경향이 있었고, 루디카는 은퇴 이후에도 꾸준히 그를 기린이라 불렀다. 다른 동료들은 마주할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종합적으로, 그를 기린이라 부르는 일이 아예 없는 이는 그의 연인뿐이었다.

 지우스.

 안방에서, 그녀가 불렀다.

 지우스는 왜, 라든지, 무슨 일이야? 라고 묻지 않았다. 보통 제 연인이 그를 이런 분위기로 부를 때는 특별히 무슨 일이나 이유가 없을 때였다. 그는 대답하는 대신 안방으로 건너가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눈 감아.

 지우스가 눈을 감았다. 곧 투구를 벗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확실히 감은 거 맞겠지.

 아직도 내가 믿음직스럽지 못한가?

 그냥 한번 해본 말인데. 새끼, 삐지기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입술에 닿아오는 부드러운 감촉. 첫 느낌은 부드러웠지만, 그들의 입맞춤은 언제나 조금 거친 데가 있었다. 네가 그러고 싶다면. 지우스는 모든 상황을 이 말로 넘겨버린 지 오래였다.

 순순히 벌어진 그의 입술 틈새로 혀가 비집고 들어왔다. 어쩐지 약간의 피 맛이 느껴지는 듯도 했다. 안 그래도 윗입술을 깨무는 느낌이 좀 거칠다 싶었는데. 지우스는 입술에서 전해지는 아릿함을 무시하며 한 손으로 연인의 뒤통수를 감쌌다. 현역 시절에도 남의 출혈에는 신경 쓸지언정, 제 피는 흐르건 말건 별 상관없다는 식으로 굴곤 했으니.

 지우스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연인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감겨들었다. 목덜미를 따라 천천히 내려오던 손끝에 이윽고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만져졌다. 머리가 조금 길었군. 지우스가 알 수 있는 건 그 정도뿐이었다. 그녀 역시, 지우스가 이런 식으로 제 사소한 변화를 가늠하는 것까지는 뭐라고 하지 않았다.

 허락한 건 딱 거기까지였지만. 지우스는 언젠가 그들 사이에 오갔던 대화를 떠올렸다.





 조건이 두 가지 있어.

 무슨 조건.

 첫째, 내 얼굴이나 이름을 궁금해하지 말 것.

 그래.

 둘째, 너는 앞으로도 평생, 나에게 두 번째일 거야. 죽을 때까지도 결코 첫 번째가 될 수는 없어.

 이해했어.

 불만 있나?

 아니, 대신 질문이 하나 있는데.

 뭔데.

 그럼 널 뭐라고 부르면 되지?

 뭘 고민해? 그동안 잘만 불렀으면서.

 ...그렇군. 알겠어.





 와론.

 지우스가 불렀다.

 맞닿은 입술이 떨어지고, 가볍게 숨을 고르는 소리. 그리고 썩 다정하지는 않은, 왜, 라는 대답. 와론은 지우스가 부를 때마다 왜, 라고 답하는 게 일상이었다. 보통 제 연인이 그녀를 이런 분위기로 부를 때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확실하게 있을 때였으니까.

 오늘은 네 옆에서 잠들어도 될까.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지우스가 말했다.

 불편할 텐데?

 상관없어.

 네놈한테 상관있는 건 대체 뭐냐, 그럼.

 네가 불편한지.

 당연히 불편하겠지.

 그럼 됐어.

 그러고는 즉시 일어나서 제 방으로 돌아가려는 듯한 움직임을 취하는 지우스였다. 그는 이미 오래전에 눈을 감은 채로 와론의 방에서 제 방으로 돌아가는 요령을 익혀둔 참이었다. 와론이 지우스의 뒤통수를 빤히 쳐다보았다. 볼 수는 없지만, 시선은 느꼈을 것이 분명했다. 시선이란 참 묘한 데가 있지. 무슨 에너지도 아닌 게 막 느껴지고 그래. 그러나 지우스는 나가는 발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거기 서.

 와론이 명령했다. 지우스가 조용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언제 봐도 신기하단 말이지. 네놈이 내 말을 잘 듣는 날이 오다니. 와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우스는 갑작스러운 명령을 들은 것처럼 우뚝 멈춰 선 게 아니라, 마치 원래 그렇게 할 생각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췄다. 내가 이럴 걸 예상했다는 거겠지. 기분 나쁜 놈인 건 여전하다니까. 와론이 쯧, 하고 혀 차는 소리를 냈다.

 그냥 여기 있어. 네 이불과 베개는 내가 가져올 테니까.

 응.

 짧게 대답하는 지우스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희미한 미소가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