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미션

커미 피도란스

약님 2025. 2. 23. 23:50

*커미션 작업물

*합의되지 않은 영구적인 신체훼손, 고어요소 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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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먼저 피도란스의 흔적을 발견한 사람은 콰링이었다. 흙바닥에 점점이 떨어진 핏방울. 그 흔적을 따라갈수록 점점 많아지는 핏자국의 양에 모두의 안색이 파랗게 질려갔다. 이만큼의 피를 흘렸다면 살아있을 확률은 얼마일까. 흔적을 찾아낼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그 확률은 무섭도록 낮아져만 가고.

 그런 와중에 그를 발견했으니, 그를 발견한 콰링은 헉, 하고 들이마신 숨을 내쉴 새도 없이 달려가 그의 생사부터 확인했던 것이다. 엉망으로 붕대가 풀려 있는 팔을 끌어당겨 맥박을 짚어 보니 차가운 손끝에 생명의 고동이 전해져왔다, 콰링은 우선 한숨을 돌리며 들판에 얼굴을 박은 채로 쓰러져 있는 피도란스의 상반신을 일으켜 그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고 나서 마주한 광경은 얌전히 눈을 감고 있는 피도란스의 한쪽 얼굴― 그리고 남은 반쪽에는 눈 대신 자리한 뻥 뚫린 구멍. 어, 승냥이님, 강인한 콰링조차도 답지 않게 말을 더듬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가까이에서 본 피도란스의 얼굴에는 흘러내린 채로 말라 굳어버린 눈물자국이 피와 섞여 있어서 더욱 선명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드문드문 끊어지는 콰링의 질문에 피도란스는 대답해 줄 수 없었다.





 10시간 전, 인적이 없는 어느 공터. 검은 복면을 쓴 이가 기진맥진한 채로 주저앉은 피도란스를 보고 있다.

 화가 나. 짜증이 나. 너 같은 기사 놈들을 보면. 옛날의 기사를 기억해? 기사는 명예의 상징. 정의의 상징. 악당들을 무찌르고 사람들을 구해내는. 그러나 그 악당이란 누가 정의하지? 언젠가부터 그랬지. 기사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그들의 명예에 흠집을 내는 자는 전부 악인. 그렇게 되어버렸어. 기사, 덕분에 삶을 구원받은, 대다수의 사람은 공감하지 못할, 기사, 때문에, 망가져 버린 내 삶은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지.

 푸른 승냥이, 당신에게 딱히 죄가 없다는 건 알아. 오히려 당신 정도면 훌륭한 기사에 속하겠지. 당신 덕에 삶을 구원받은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당신은 기억해? 지룬, 이라는 이름을 기억해? 당신에게 구원받은 사람만 있는 건 아니야. 당신이 구할 수 있었던 사람만 있는 건 아니야. 당신이 모두를 구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당신이 구할 수 없었던 단 한 번의 실수가, 나의 인생 전부였다면, 당신은 어쩔 테지. 승냥이, 이게 뭔지 알아? 젓가락이야. 밥 먹을 때 쓰는. 라면 먹을 때 쓰는. 쇠젓가락도 아니야. 쉽게 부러지는 나무젓가락. 그걸로,

 찔렀지. 찌른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만큼, 뭉툭한 그 나무젓가락 끝으로. 기사의 육체 어디에도, 그런 걸로 상해를 입힐 수 있는 부위는 존재하지 않아. 딱 한 군데를 제외하고. 처음 약하게 찌른 손에 힘을 주어, 꾹 눌러, 젓가락이 느릿하게 안쪽으로 들어갈 때까지. 생각보다 많이 튀네. 옷이 더러워지겠어··· 정말로 소리를 지르지 않네. 역시 기사. 대단하네. 눈물은, 뭐, 반쯤 무의식적인 거니까. 그건 봐줄게··· 그럼 먼저 간다. 안녕, 기사.

 그는 제 머리에 총구를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 상반신이 느리게 기울어지는 동시에, 반대 방향으로 피가 튄다. 터져 나온 핏방울들은 여유롭게 공중을 잠시 유영하다가 쏴악, 하고 아래로 쏟아져 내린다. 땅에 닿기 전에 숨이 끊어진 시체가 텅,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부딪힌다. 굴러온 시체의 눈알에서 피가 한 줄기 흘러내린다. 피도란스는 남은 한쪽 눈으로 그 눈을 억지로 마주했다. 거리상으로, 빠르면 아침이 밝기 전에 동료들이 그를 구하러 올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긴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하염없이 앉아 있다가 동이 터올 때쯤에야 정신을 잃었다.





 다시 현재. 콰링은 당황했지만 빠르게 대처했다. 연락을 받고, 근처에서 수색 중이던 루지안이 바로 뛰어왔다. 루지안 또한 피도란스의 모습을 눈에 담은 순간 덜컥, 하고 발이 멈추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콰링의 도움을 받아 피도란스를 업은 루지안이 땅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꽉 앙다문 입술 위로 루지안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피도란스의 팔은 축 처진 채로 인형처럼 흔들리고만 있었다. 자기보다 몸집이 큰 성인 남성인 데다, 정신을 잃었다는 점까지. 만만치 않은 무게였지만, 루지안은 잠시도 멈추지 않았다. 콰링이 카톤으로 지우스에게 연락하는 동안, 루지안은 계속 달렸다.

 하필이면, 지우스는 루지안과 콰링이 있는 곳으로부터 가장 먼 곳에 있었다. 즉시 콰링이 다른 견습 기사들에게로 연락을 돌렸다. 루지안과 콰링 둘만으로는 축 늘어진 피도란스를 의원이 있는 곳까지 빠르게 옮기기가 어려웠다.

 각지에 흩어져 있던 견습 기사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모이기 시작했다. 파이멜, 투리순, 다리곤, 와드린··· 한 명씩 그들 앞에 모습을 나타낼 때마다 새로 온 사람에게로 피도란스를 넘겨주면서 달렸다. 피도란스를 업고 뛰는 사람이 지쳐가면서 속도가 조금이라도 느려질 기미가 보이면 바로 교대했다. 그들 모두 한 가지 생각만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 빨리. 더 빨리.

 마침내 숲을 가로질러 달려온 루디카가 그들과 조우했을 때는, 예상보다 훨씬 빠른 만남에 루디카가 놀랄 정도였다.

 “···다들 고생했다. 이제··· 나한테 맡기고 쉬어.”

 루디카는 그 말만을 남기고는 피도란스를 받아서 안아 들고, 의원이 있는 곳을 향해 나는 듯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견습 기사들이 모두 지쳐 주저앉은 와중에, 몇몇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였고, 몇몇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일 분쯤 지났을까, 자리에서 일어난 루지안이 굳은 표정으로 루디카가 간 방향을 따라 달려갔다. 그들 중 누구도 어디 가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 뒷모습을 본 모두가 하나둘씩 자리를 털고 일어나 심호흡과 함께 다시 달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깨어난 피도란스는 지난밤의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손가락이 거즈로 덮인 울퉁불퉁한 요철에 걸렸다. 이게 뭐지? 손을 뻗어 더듬더듬 만져 본 왼쪽 눈가에는 단단히 감긴 붕대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 거즈 위를 더듬다 기어코 붕대를 뚫어낸 손가락이 그 안으로 쑥 들어갔다. 손끝이 어딘가에 닿을 때까지. 눈을 찌르리라 기대되던 손끝은 생각보다 훨씬 더 깊이, 들어가면 안 될 것 같은 깊이까지 끝도 없이 들어갔다. 마침내 그 손끝은 그 안쪽 어딘가의 뭔지 모를 살덩이에 닿았고,

 미처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터져 나온 피가 손끝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응급처치는 빠르게 이루어졌다. 피도란스는 절대 안정을 취할 것을 권고받았다. 기사를 은퇴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몇 달간은 기사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음이 명백했다. 지우스는 일단 특수 2기에서 일시적으로 피도란스를 제외한 뒤, 마을이 멀지 않은 어느 한적한 숲에 있는 작은 오두막을 피도란스의 임시 거처로 내주었다.

 “···이런 곳이 있었나?”
 “임무 때문에 이쪽으로 나와 있을 때면 종종 거처로 사용하던 곳이야. 당분간은··· 아니, 원할 때까지 있어도 되니까 편하게 있도록 해.”

 피도란스는 대답 없이 느린 걸음으로 집안을 가로질러 가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그 뒷모습을, 지우스는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지우스가 아는 피도란스는 절대로 저렇게 넋 빠진 모양으로 느리게 걷지 않았다. 피도란스는 언제나, 걸음만으로 그 공간을 장악할 수 있을 것처럼 당당하게 걷는 사람이었다. 처음 발을 들인 곳에서도 그곳의 주인처럼 걷는 사람. 어딜 가든 쉽게 그 공간을 자신의 영향력으로 덮어 버리는 사람.

 그러나 지금의 피도란스는 이 작은 공간조차도 제 것처럼 쓸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지우스는 피도란스를 그 집에 두고 나온 뒤 한참을 밖에서 서성이다가, 카톤을 꺼내 루디카에게 연락을 넣었다.

 - 임시 거처에 승냥이. 잘 있는지 가끔 지켜봐 줘.

 그러나 가끔 들러서 확인하는 것 정도로는 피도란스의 상태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을, 지우스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이 상처는 평생 낫지 않을 것만 같다. 피도란스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조금 보기 흉하게 아문 상처에서는 이제 피가 흐르지 않았다. 피도란스는 작은 방에 딸린 거울 앞에 섰다. 거울에 선명하게 비치는 자기 모습을 바라보았다. 붕대 아래를 손가락으로 더듬어 보면, 원래라면 손가락에 걸려야 할 것이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이 천천히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올랐다. 피도란스는 사진을 찍을 때처럼 가볍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주먹을 휘둘러 거울 속의 웃는 얼굴을 부쉈다.

 깨진 유리 조각은 굳이 치우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그는 다시는 그 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루디카가 처음 찾아왔을 때, 피도란스는 그럭저럭 예전과 비슷한 표정을 꾸며낼 수 있게 되었다. 루디카를 위해 간단한 다과를 내오면서, 피도란스는 특수 2기 기사들과 견습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물었다. 요약하자면 다들 잘 지내고 있다는 루디카의 말을 들으며, 피도란스는 다행이라며 제 앞의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한쪽 눈만으로는 거리감이 영 익숙지 않아 몇 번의 헛손질을 해야 했다. 아직은 무엇을 손으로 잡으려 할 때마다 늘 그랬고, 벽이나 문에 부딪히는 일도 허다했다. 루디카는 그 모습을 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경 쓰지 마. 피도란스가 그날 가장 많이 한 말이었다. ···그래. 루디카가 조용히 대답했다.





 가끔 피도란스의 손가락은 제멋대로 움직여 이미 아무것도 없는 빈 눈구멍 안을 휘저으려 했다. 상처에 앉은 딱지를 저절로 떨어지기 전에 굳이 떼어내고 싶어 하는 심리인지. 붕대를 풀거나 뚫어내고 상처를 손가락으로 휘저으면, 상처는 지금 막 생겨난 것처럼 선혈을 뚝뚝 뱉어댔다. 마룻바닥이 금방 핏자국으로 물들었다. 피도란스의 상처는 그런 식으로, 아무는 과정에서 몇 번이고 방해받곤 했다. 그 주인에 의해서.

 그러다 루디카가 오는 날이면, 피도란스는 그런 꼴을 보이지 않기 위해 제 손을 스스로 묶어놓았다. 그럼에도 루디카가 보는 앞에서 자꾸만 손이 얼굴로 올라가려는 걸 끌어내려야 했다. 대화는 거의 특수 2기 기사들의 근황으로만 이루어졌다. 루디카는 피도란스에게 어떻게 지내냐, 등의 말을 묻지 않았다. 피도란스는 그것이 고마웠다.





 그러던 중에 견습 기사들이 찾아온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승냥이님, 계신가요? 지우스가 일러준 장소로 찾아온 견습 기사들은 저마다 손에 꽃이나 빵, 커피 등을 들고 있었다. 피도란스가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그들도 아는 바가 없어서 아무거나 사 오는 수밖에 없었다. 늘 견습 기사들이 좋아하는 것을 먹자고 하던 피도란스였기에.

 승냥이님? 파이멜이 피도란스를 부르며 문을 두드렸다. 대답은 없었다. 10분쯤 되었을까. 몇 번 정도 더 문을 두드리며 불러보았지만, 여전히 대답은 없었다.

 이유 모를 불안감이 견습 기사들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피도란스는 누가 찾아오든 번개같이 문을 열어 환영해 주는 사람이었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나름의 초조함을 나누던 견습 기사 중 투리순이 가장 먼저 행동에 나섰다. 문고리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몇 번쯤 시도하니 문이 거칠게 열렸다. 피도란스는 어디에도 없었다. 투리순이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지르는 동안, 바로 뒤에 뛰어 들어온 루지안이 닫혀 있는 방문으로 돌진했다.

 의외로 쉽게 열린 문 때문에, 루지안은 하마터면 바닥에 깔린 유리 조각 위로 엎어질 뻔했다. 겨우 중심을 잡은 루지안이 앞을 보았다.

 피도란스가 멍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루디카, 왔어? 그 말이 나오려다가 견습 기사들의 모습을 보고 멈칫했다. 아무렇게나 풀어 헤쳐져 바닥을 장식하고 있는 붕대들.

 콰링은 제 입을 손으로 막았고, 다리곤은 눈을 질끈 감으며 시선을 피했다. 와드린이 반사적으로 표정을 찌푸렸다. 루지안만이 떨면서도 조금씩 다가가고 있었다. 앞으로 뻗은 루지안의 손끝이 피도란스의 피투성이 손에 닿았다. 이 상처는··· 평생 낫지 않는 상처일 것만 같아.

 그들 중 누구도, 그 말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