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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들 현대au (5)잔불의 기사 2024. 4. 6. 04:30
지우스가 새집에 이사 온 지도 몇 달이 지났다. 길가에는 목련과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그러자마자 날씨가 급속도로 더워지면서 꽃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그러는 동안 지우스가 일하는 학원에서는 3월을 맞았고, 새로운 학생들을 받았고, 중간고사를 거쳤다. 정신없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지우스와 같은 직종이라던 파디얀과 루디카도 요즘은 제법 바빠 보였다. 다랑은 여전히 아침마다 효율 좋은 알람을 제공했다. 오며가며 인사할 때마다 그때 주셨던 자미떡이 참 맛있었다고 넉살 좋게 말하길래 남은 자미떡 대부분을 다랑에게 선물했다.
물론 모든 이웃이 지우스의 일상을 평화롭게 장식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아주 예상을 못 한 바는 아니었지만, 302호 여자는 지우스의 상상 이상으로 귀찮은 존재가 되었다. 아예 지우스가 집에 있는 것 같다 싶으면 시도 때도 없이 내려와서 목걸이에 대해 캐묻곤 했다. 그날, 302호는 지우스가 알려준 장소에서 잃어버린 목걸이를 무사히 찾았다고 했다. 그러나 302호는 지우스가 목걸이에 대해 무언가를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듯했고, 그 확신은 지우스가 우연히 맞힌 거라고 거듭 주장해도 흔들리지 않았다. 윗집 여자가 어찌나 자주 찾아왔는지, 오죽하면 다랑이 어느 날 머뭇거리면서 물어봤을 정도였다.
“그... 혹시, 302호 여자분... 전여친이라든가, 뭐 그런...”
“아니거든요!!!”
마침 옆에서 듣던 피도란스가 놀렸다.
“와~ 너 그거 거의 십 년 만에 처음 소리 지른 거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십 년 동안이나 이렇게 소리 지를 일이 없었나? 고개를 갸웃거리는 지우스에게 피도란스가 말했다. 왜, 그때 있잖아. 거의 십 년 전에 네가... 그 뒤로 피도란스의 입에서 나온 일화는, 그들의 추억이라기엔 꽤 생소하게 느껴졌다. 그런 일이 있었나? 지우스는 미간을 찡그리며 생각에 몰두했다. 스스로 기억력에 자신이 없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도, 몇 년 전 일을 떠올리려 하면 묘하게 기억하는 데 제동이 걸리곤 했다. 어쩌면, 밤에 이상한 꿈을 자주 꿔서 잠을 잘 못 이룰 때부터...
“뭐야~ 기억 안 나?”
아, 그렇지. 그런 일이 있었다. 머릿속이 맑아지면서 갑자기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거의 매일 피로에 시달리고 있던 지우스는 그것이 꽤 부자연스러운 현상임을 인지하지 못했다.
지우스의 원인 모를 꿈은 여전히 매일 밤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무슨 꿈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거의 매일 밤 그를 식은땀에 절은 채로 일어나게 하는 꿈. 수면 부족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지우스는 커피를 물처럼 마시며 매일을 견뎌냈다. 동료 선생님인 달잔이 지우스의 안색을 보고 젊은 사람이 벌써부터 왜 그렇게 초췌하냐며 걱정하긴 했지만, 지우스로서는 별도리가 없었다. 글쎄요, 애들이 절 늙게 하는가 봅니다. 하하, 애들이 지우스 선생님 좀 많이 귀찮게 하긴 하지? 네...
학생들 기말고사까지 정신없이 흘러간 뒤, 방학이 찾아왔다. 방학 특강을 해야 하는 지우스에게는 별로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7월에는 며칠뿐이라도 학원 방학이 있었다. 특별한 일정이 없으니, 오랜만에 죽은 듯이 잠이나 푹 잘 계획이었다.
“그러니까 빨리 너네 집들 가.”
그 방학이란 게 옆집 이웃들과 겹치지만 않았더라면.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쫓아내는 거야~?”
“...옆집이잖아.”
사실, 파디얀과 루디카는 놀러 올 때 빈손으로 온 적이 거의 없었다. 루디카는 늘 적당히 우물거리기 좋은 간식거리를 가져오거나 지우스의 취향에 맞는 책을 빌려주곤 했고, 파디얀은 지우스의 집 냉장고를 마치 자기 집 냉장고 쓰듯이 꽉꽉 채워주고는 요리까지 해줄 때도 있었다. 아무리 지우스가 혼자 쉬는 걸 좋아한다지만, 가끔 놀러 와서 일상에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고마운 이웃들을 쫓아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럼 너는 나가.”
“야~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오늘은 마침 피도란스도 와 있었다. 원래는 잠깐만 들렀다 갈 예정이었지만, 비가 하늘에 구멍이라도 뚫린 듯이 쏟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만 잠잠해지면 가라, 하고 내버려두다 보니 거의 몇 시간째였다. 비는 조금도 잦아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직 본격적인 장마는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지우스가 폭우에 사정없이 공격당하고 있는 창문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한숨지었다.
초인종이 울린 건 그때였다.
“누구세요?”
“...저... 102호인데요...”
문을 열어보니, 빨간색 장화를 신은 다랑이 짐을 잔뜩 든 채로 덜덜 떨고 있었다.
“집에 물이 들어와서... 아! 다들 여기 계셨네요!”
“침수됐다고요?”
내려가 보니, 정말로 1층 바닥이 물바다였다. 참상을 확인하고 돌아오니 여름 감기라도 걸린 듯 연신 코를 훌쩍거리던 다랑이 파디얀의 담요에 돌돌 감겨 있었다. 가져온 짐은 커다란 배낭 두 개였는데, 귀중품만이라도 급하게 챙겨서 나왔다는 듯했다.
“일단... 젖으면 안 되는 건 대충 다 높은 데 올려놨고... 그러다 보니까 집이 너무 추워져서... 2층에서 조금만 신세 져도 될까요...? 파디얀 씨와 루디카 씨 집에 먼저 찾아갔는데 아무도 없길래... 에에, 에취!!”
“...감기약도 있으니까 드세요...”
“어어... 그렇게까지...? 아니요! 그렇게까지 신세를 질 순...!”
그리고 또 한 번 요란한 기침. 결국, 다랑은 지우스가 꺼내준 감기약을 먹고 따듯한 유자차를 마시면서 요양하게 되었다. 다랑이 지우스의 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은 뒤, 또 한 번 초인종이 울렸다. 지우스가 또다시 지끈거리기 시작한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번엔 또 뭐... 아, 이젠 한 명 빼고는 더 올 사람도 없지.
302호에 사는 회백발 여자였다.
“왜.”
“...물 샌다, 3층.”
“대체 왜?”
“내가 알겠냐고.”
올라가 보니,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다. 참상을 확인하고 돌아오니 회색 머리가 비에 젖어 차분해진 302호 여자가 루디카의 담요에 돌돌 감겨 있었다. 가져온 짐은 커다란 배낭 한 개였는데,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는 말해주지 않으려 했다.
그래서... 멀쩡한 건 2층뿐이야? 지우스가 어느새 그리 넓지도 않은 집에 옹기종기 모인 군식구들을 둘러보며 한숨을 속으로 삼켰다. 아니, 침착하자. 일단 비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피도란스는 우리 집에서 재우고, 다랑과 302호는 파디얀과 루디카의 집에서 하루 신세 지게 하면...
“사람도 많이 모였으니까 다 같이 저녁 해 먹으면 되겠다!”
파디얀이 그렇게 심심하게 해결되도록 놔둘 리가 없지. 그러고 보니 저녁 먹을 시간이 지나 있었다. 다들 배고팠는지, 저녁이라는 말을 듣자 모두의 얼굴에 약간의 생기가 돌았다. 지우스도 약간 허기를 느끼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체 언제 친해진 건지 어느새 피도란스가 나서서 파디얀과 함께 부엌을 점령하는 걸 보고, 지우스는 마침내 모든 걸 놓아버렸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이 바보들아...
얼마 안 있어 맛있는 냄새가 집안을 꽉 채웠다. 지우스는 그런 고급진 요리를 만들 수 있는 재료가 자기 집 냉장고에 있었는지도 몰랐다. 방 한구석에서 그 냄새를 맡고 갑자기 원기를 회복한 듯한 다랑이 담요를 걷어차고 벌떡 일어나면서 말했다.
“다 같이 먹는 자리에서는 이게 빠질 수 없죠!!”
다랑이 배낭에서 꺼낸 것은... 술이었다.
...이봐, 당신 감기라며.-
- 다음 편 예고 -
“새우가 불쌍하지 않아...? 얘네도 여기 들어가려고 열심히 산 건 아닐 거 아냐... 새우도 열심히 살았는데 결국은 여기 들어가게 됐잖아... 우리는 여기 들어간 새우보다 열심히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새우는 결국 여기 들어갔는데...”
“루디~! 갑자기 또 왜 울어... 응, 그치... 새우 불쌍하다... 불쌍하니까 내가 새우 하나 까줄게... 아니~! 울지 말고 울보야~ 너 울면 나도 슬프단 말이야~”
“파디얀 씨! 전골 지인짜 맛있어요~ 국물도 칼칼하고 간이 딱! 된 것이~ 아! 새우요? 새우도 진짜 맛있죠! 어어... 루디카 씨? 왜 울고 계세요? 전골 진짜 맛있는데... 국물도 칼칼하고 간이 딱...”
“...그러니까 우리는 사실 모두 통속의 뇌일 수도 있다는 거야. 우리가 통속의 뇌라면 우리가 하늘을 바라봤을 때 보이는 하늘은 사실 실험실 천장일 수도 있는 거고, 그럼 실험실 천장이 하늘색이라서 우리가 보는 하늘이 하늘색으로 보이는 것일 수도 있는 건데, 그럼 하늘을 하늘색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라 하늘색이 먼저 존재하고 하늘이 나중인 거지? 그럼 우리는 통속의 뇌로서 평생 하늘색인 실험실 천장을 바라보면서 그걸 하늘이라고 여기는 건데 만약 천장이 보라색이었다면 우리는 하늘을 보고 하늘이라고 불렀을까 보라라고 불렀을까? 물론 이건 우리가 통속의 뇌일 거라는 가정하에 세운 의문이지만, 그렇지만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우리는 확실히 통속의 뇌가―”
“지우스 정신 좀 차려봐...”'잔불의 기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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