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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면무도회 기린닭 (上)
    잔불의 기사 2025. 2. 16. 13:28


     조명은 끔찍하게 밝았다. 주변 소음이 귀를 먹먹하게 채웠다. 홀 안이 담배 연기로 자욱했고, 온갖 향이 마구잡이로 조합되어 한층 더 지독하게 느껴지는 향수 냄새가 후각을 자극했다. 오감을 동시에 공격해 대는 환경에, 단체로 약이라도 했는지 부자연스러울 만큼 텐션이 높은 사람들까지.

     지우스는 이곳에 단 5분이라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일단 지금은 도저히 홀에서 느껴지는 불쾌감을 참을 수 없어 발코니로 피신한 상태였다. 처음 들어간 발코니에서는 난간에 허리를 아슬아슬하게 걸친 여자와 앞섬을 다 풀어헤친 남자가 격렬하게 키스하고 있는 현장을 마주했다. 당장 이곳을 떠나고 싶은 욕구가 오천 배쯤 불어나는 광경이었다.

     그는 이런 종류의 잠입 임무를 좋아하지 않았다. 술을 마시는 사람들 곁에 있고 싶지 않았다. 그는 술집과 바 같은 장소를 멀리했고, 기사로 살다 보면 종종 초대를 받곤 하는 파티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정신을 흐리게 만드는 액체를 거리낌 없이 입에 넣었다. 그렇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기를, 처음 보는 사람들 앞에서조차 망설이지 않았다. 지우스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어떨 때는 조금 부러웠다. 살면서 단 한 순간이라도, 마음껏 긴장을 풀 수 있는 삶이란 어떤 삶일까. 적어도 지휘관의 삶은 아닐 것이었다. 

     그를 이런 장소에 끌어낼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그 사람이 아니라면, 그는 온 사방에 주정뱅이와 마약쟁이가 널린 곳에서 하룻밤을 제정신으로 보내겠다는 선택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분명히 이런 환경을 지우스보다도 더 혐오할 게 뻔한 와론이 임무 종료 시까지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였다. 지우스의 머릿속에, 임무 시작 전 잠깐 나눴던 대화가 문득 떠올랐다.

     - 이곳에서는 모두가 가면을 써야 한다고 하더군.
     - 귀찮네. 뭐, 어쩔 수 없지.
     - ...... 
     - 뭐. 왜 그런 눈으로 봐?
     - 가면, 써도 괜찮은가 싶어서.
     - 야, 됐어. 먼저 가 있기나 해. 준비하고 따라갈 테니.

     그러고 보니,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투구도 쓰지 않은 와론을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와론이 먼저 아는 척을 해주려니 했는데, 와론이라면, 지우스가 혼자 약쟁이들 사이에서 끼여 죽도록 내버려 두고 홀로 파티장을 쓸어버리려고 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성공하면 경력, 실패하면 경험··· 그렇지만 그런 경험이 인생에 꼭 필요할까? 

     발코니 난간에 기대어 서 있던 지우스가 몸을 일으켰다. 여기에서 줄곧 기다리느니 들어가서 와론 비슷하게 생긴 사람이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에서였다. 쉽지 않은 여정이 되겠군.

     그러나 홀 안으로 한 발을 들이자마자, 지우스는 와론을 바로 찾아내고야 말았다.

     다른 인간 덩어리들 속에서, 와론은 독보적인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와론이 입은 검은색 드레스는 파티장의 쨍한 조명 아래에서 진한 남색으로 고풍스럽게 빛났다. 위쪽은 몸에 달라붙는 스타일이었지만, 무릎 아래쪽은 폭이 넓어서 아래쪽이 멋지게 펼쳐지는 드레스였다. 어깨까지 내려온 회백색 머리카락은 끝부분만 살짝 컬이 들어가 우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드레스와 같이 검은색인 가면 곳곳에 박혀 있는 붉은색 보석들은 하나도 떨어진 데 없이 완벽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지우스는 잠시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무의식적으로 왁스를 발라 뒤로 넘긴 제 머리카락에 손을 올렸다. 어쩐지 머리만 대충 만진 제 모양새가 상대적으로 초라하다고 생각되기 시작했다.

     지우스가 정신을 차리고 그쪽으로 다가가는 동안, 와론은 제 주위로 끈적하게 달라붙는 남자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듯이 살짝 기울인 고개와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는 입꼬리, 자연스러운 손짓― 그 모든 요소에서 품격이 묻어났다. 지우스는 코앞까지 갔을 무렵에야, 파트너가 있어서요, 하고 선선히 말하는 와론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다음 순간, 와론과 지우스의 눈이 마주쳤다. 와론의 눈동자는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지우스는 와론이 자신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두 사람 중 한쪽이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노랫소리가 홀을 채우기 시작했다. 음악에는 문외한인 지우스가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이건 왈츠로군. 과연,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둘 손을 맞잡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를 그저 바라보았다. 그 누구도 먼저 손을 뻗으려 하지 않았다.





     뻘쭘하게 흐르는 음악을 견디다 못한 지우스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제법 훌륭한 오판이었다. 와론이 그 손을 붙잡고 온 힘을 다해 끌어당겼기 때문이었다. 그가 중심을 잃으면서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한순간에 좁혀졌다. 넘어지기 직전, 와론이 그를 거칠게 떠밀어 중심을 잡도록 도와주었다. 끌어당겨진 손목과 밀쳐진 가슴팍이 모두 얼얼해져 왔다.

     - 아파.
     - 아프라고 한 거야.
     - ···춤, 출 줄 알아?
     - 모르면 가만히 있기나 해.

     그러고는 지우스의 손을 잡아서 자기 허리에 갖다 붙였다. 행동 하나하나가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 손으로 상체를 받쳐. 그러나 지우스가 딱히 와론의 상체를 받쳐줄 필요는 없어 보였다. 지우스는 역할을 잃은 손을 어정쩡하게 와론의 등에 얹은 채로, 박자에 맞춰 움직이는 와론을 따라 스텝을 밟았다. 와론은 어느 정도 의심을 피할 수 있을 만큼만 발을 적당히 움직이면서, 가끔 지우스를 휙 끌어당겼다가 도로 밀치기를 반복했다. 세상에서 가장 야생적인 왈츠였다.

     그러면서도 종종 누군가의 시선이 의식될 때면, 와론은 우아하게 한 바퀴를 돌거나 하며 제법 춤 같은 동작을 해 보였다. 부드러운 옷감끼리 스치는 소리와 함께, 길게 늘어진 치맛자락 사이로 발목이 아주 잠깐 드러났다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지우스는 그저 와론의 손에 매달려 있으면서 중심을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음악이 끝나가고 있었다. 음악이 끝날 기미가 언뜻 보이자마자, 와론은 지우스의 손을 붙잡고 발코니로 이끌었다. 겉으로 보기엔 춤을 추면서 자연스럽게 장소를 옮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끌려가는 지우스는 죽을 맛이었다. 손이 으스러지는 것 같았다.

     마침내 발코니(다행히, 아무도 없었다)에 도착한 와론이 그의 손을 홱 놓더니 짖었다.

     - 설명.
     - ···무슨.
     - 작전. 너 지휘관 아니냐?

     그러니까 이 짓을 대체 언제까지 해야 하는지 당장 불라는 뜻이었다. 지우스가 한숨을 쉬듯 말했다.

     - 잠입 임무를 계속하면서 조직의 간부를 찾아 밖으로 유인한 뒤 조용히 제거한다.
     - 다른 거.
     - 여기 조직의 간부 되시는 분 있냐고 단상 위에 올라가서 직접 물어본다.
     - 염병하지 말고.
     - ···사상 지평으로 다 날려버리고 그중에 목표물이 있기를 빈다.
     - 뒤질래?

     이상, 세 개뿐이야. 지우스의 단호한 대답을 들은 와론이 뒤통수를 긁적거렸다. (뒤통수로 손을 뻗었다가 투구가 아닌 머리카락이 만져지는 데 잠깐 놀란 듯한 모습을, 지우스는 놓치지 않았다) 사상 지평만 빼면, 그나마 3번이 제일 마음에 들긴 하는데.

     지우스는 그 말에 무심코 동의하고 싶은 마음을 꾹꾹 억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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