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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10분만 더 싸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우스는 흐려져 가는 의식을 간신히 붙든 채로 생각했다. 원래 이 정도 부상이라면 아무리 기사라도 더 이상 싸울 수 없다. 지금 지우스가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서 있는 것만 해도 가공할 정신력을 바탕으로 한 기적이었다.
물론 고민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 10분을 5분 이내로 줄이는 방법과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몸을 5분간 더 싸울 수 있게 만드는 방법. 둘 다 지우스의 손끝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지우스는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사상 지평에는 상처를 치유하거나 지혈하는 능력이 전혀 없다. 그저 몸에 힘이 넘쳐나니 마취라도 된 것처럼 잠깐 고통을 잊고 싸울 수 있게 만들어줄 뿐. 그 5분간의 싸움은 오히려 부상 악화를 가속시키겠지만...
...만약, 그가 죽는 게 아쉬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뒷감당을 맡아주겠지.
그는 손을 돌렸다.
[05:00] 담청색 기린, 사상 지평 사용.
[04:56] 새까만 닭, 3km 밖에서 푸른색 번개 확인.
[04:49] 새까만 닭, 푸른색 번개가 치는 쪽으로 이동.
[04:14] 담청색 기린, 반경 100m 내의 적 모두 제압 완료. 푸른 승냥이 쪽으로 이동.
[03:36] 담청색 기린, 푸른 승냥이 지원.
[03:05] 새까만 닭, 담청색 기린의 이동 확인.
[02:57] 새까만 닭, 담청색 기린의 흔적을 따라 추적 시작.
[02:08] 담청색 기린, 회적색 여우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
[01:22] 담청색 기린, 회적색 여우 지원.
[00:20] 담청색 기린, 새까만 닭이 있는 방향으로 이동.
[00:05] 담청색 기린, 새까만 닭과 조우.
“...네 손에 죽으러 왔어.”
[00:00] 사상 지평 지속 시간 종료.
기린은 간이침대에 누운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새까만 닭은 간이침대 옆 의자에 걸터앉아 그의 상태를 지켜보면서, 론누에 기린의 피를 묻히고 싶은 강렬한 충동과 싸우고 있었다. 내 손에 죽으러 왔다고 했었지. 상태를 보니까 그러려면 조금 서둘러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의원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으려나? 닭이 기린의 옆구리 쪽에 난, 건드리기도 무서운 상처를 들춰보았다. 새빨갛다 못해 검은 피 때문에 뭐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대체 뭘 어떻게 싸웠길래 부상이 이 지경이지. 이 새끼 분명 사상 지평 사용하기 전부터 이 상태였을― 잠깐, 사람 피가 이렇게까지 검을 수가 있나?
닭이 기린의 상처를 가까이에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상처 자체도 심각했지만, 상처의 중심에서부터 서서히 피가 검게 물드는 것 같은 게... 어째, 한눈에 보기에도 불길해 보이는데. 잘난 마법사 놈들에게라도 당한 건가? 닭이 중얼거리며 상처를 가볍게 툭, 건드렸다.
“윽...!”
의식이 없어 보였던 기린이 고통스러운 신음과 함께 크게 움찔하며 돌아누웠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상처를 가리려고 하는 듯했지만, 상처를 건드리는 순간의 고통 때문에 차마 손을 댈 수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어쭈, 이것 봐라. 닭이 아는 기린은 상처에 손 좀 댔다고 펄쩍 뛰어오를 만큼 아픈 걸 못 참는 이가 아니었다. 흠, 어쩐지... 의원이 오기 전에 할 일이 좀 생긴 것 같은데?
“이런 게 박혀 있었나?”
기린의 입에서 나오는 고통에 젖은 신음을 깡그리 무시한 채로 몇 번쯤 상처를 들쑤셔 본 결과, 상처 안쪽에서 조잡하게 깎은 뾰족한 돌조각 같은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온통 새까맣게 변질된 상처 안에서, 돌조각은 독보적으로 새까만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그럼 이걸 빼내야 한다는 것 같은데.”
한시라도 빨리, 그렇지? 닭이 대답을 구하듯 기린의 얼굴을 흘낏 쳐다보았다. 기린은 여전히 고통 속에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진즉에 기절하지 못하고 계속 고통스러워하는 것도 이 돌조각 때문인 것 같군. 이래서야 죽이더라도 내가 죽인 건지 이 돌 쪼가리가 죽인 건지 알 수 없잖아, 새끼야.
닭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이 망토를 벗어들었다. 정말, 내키진 않지만, 적당한 게 이거밖에 없으니까. 먼지투성이라도 어쩌겠어. 망토를 흔들어 먼지를 대충 털어낸 닭이 망토 자락을 기린의 입에 물렸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풀리지 않도록 목 뒤로 망토를 단단히 묶는 것도 잊지 않았다.
빠르게 끝내는 게 피차 좋겠지. 닭이 오른팔을 크게 두 번 돌리고, 손을 허공에 휙휙 내저은 뒤 망설임 없이 손가락 두 개를 기린의 상처에 쑤셔 넣었다. 예상한 대로, 상처에 손이 닿는 순간부터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간이침대에서 뛰어오를 기세로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마구 터져 나오는 기린의 목소리가 입에 물려놓은 망토에 먹혀들어 갔다. 시간을 더 끄는 한이 있어도 손발을 묶어놨어야 하는 건데. 닭이 다른 한 손으로 기린의 움직임을 최대한 잡아 누르며 돌조각 빼내기에 집중했다. 두 손가락만으로는 피에 미끈거려서 잘 빠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닭이 손가락 하나를 더 쑤셔 넣었다. 세차게 경련하던 기린의 몸이 또 한 번 크게 움찔했다. 손에서는 주먹을 지나치게 꽉 쥔 탓에 손끝과 손바닥이 만나는 지점에서 새로운 유혈사태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기린이 지치지도 않고 어차피 망토에 먹혀들어 갈 소리를 계속 내지른 지 몇 분이 지났을까, 사투 끝에 돌조각이 손가락 끝에 딸려 나왔다. 톡, 하는 별거 아닌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돌조각은 피범벅이면서도 그 새까만 자태를 잃지 않았다. 돌조각이 빠졌음을 확인한 닭이 재빠르게 지혈을 시작했다. 다행히도 돌조각이 빠지자마자 기린의 몸부림은 즉시 그쳤다. 얼추 지혈을 마친 닭이 기린의 입에 물려놨던 망토를 빼주었다. 기린은 거의 탈진 상태로 보였다.
“기린? 살아 있냐?”
대답이 없었다. 의식은 있는 것 같은데...
“기린?”
닭이 쯧, 혀 차는 소리를 내고는 다시 한 번 불렀다.
“지우스?”
“...왜...”
“왜라는 말이 입에서 나오냐? ‘내 힘’ 살아있나 보는 거잖아. 싸가지 안 챙겨?”
“왜... 안 죽였...”
그러고는 더 말이 없었다. 고르게 변한 숨소리를 보아하니 이제 정말로 기절한 듯했다. 닭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간이의자에 주저앉았다. 일단 목숨은 붙여 놨는데, 살아나면 진짜 사상 지평만 쏙 빼서 써버리고 목을 따버리든 해야지.
지우스는 닭이 옆에서 씩씩대는 것도 모른 채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