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승냥기린 첫만남 날조
    잔불의 기사 2024. 4. 10. 13:50

     

     신입 기사, 푸른 승냥이 피도란스가 소년을 만난 것은 슬슬 더워질 시기의 늦봄이었다. 이제 막 기사가 되어 임무보다는 개인 훈련에 더 시간을 쏟아야 했던 시절. 피도란스는 그 누구보다도 훈련에 가장 성실하게 임하는 기사였다. 그날은 그런 피도란스조차도 잠시 훈련을 멈추고 밖으로 나와 바람을 쐬고 싶었던, 사람 기분을 변덕스럽게 만드는 봄날이었다.

     “...푸른 승냥이님?”
     “응? 나?”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바로 휙 뒤돌아본 피도란스가 뒤늦게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푸른 승냥이라는 이명을 받은 이후로, 후배 견습 기사에게 이명으로 불리는 것은 처음이었다. 누구라도 조금은 들뜰 수밖에 없는 기사로서 처음의 순간.

     꽤 어려 보이는 진녹색 머리의 소년이 피도란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견습. 무슨 일이야?”
     “혹시 승냥이님께 개인 지도를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개인 지도라고? 나는 아직 너희를 지도하기에는 좀...”

     피도란스가 살짝 난감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사실, 후배와의 대련은 피도란스가 곤란해하는 상황 중 하나였다. 선배 기사들이야 노련하고 능숙하니 피도란스의 넘치는 힘을 받아넘길 수 있겠지만, 후배들은 그렇지 못해 다칠 수도 있으니까. 훈련 때마다 늘 전력을 다해서 임하는 게 습관인 피도란스로서는 아직 기사치고 힘 조절이 익숙지 않았던 탓이다.

     “한 번의 대련이라도 직접 겪어 보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근데, 괜찮겠어? 나는 아직 손대중하는 게 좀 서툰데.”
     “...그렇기 때문에 승냥이님께 부탁드리는 겁니다. 기사란 아무리 강한 적 앞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야 하는 이들. 실력이 비슷한 동기들과의 대련도 물론 도움이 되지만,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강자와의 싸움이야말로 언젠가 실전에서 맞닥뜨려야 할 상황입니다.”

     피도란스는 소년을 슥 훑어보았다. 아무리 봐도 강해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더 그래 보이는지는 몰라도, 소년의 체격은 어찌 보면 조금 왜소해 보이기까지 했다. 솔직히 말하면, 기사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까지 들었다. 피도란스가 사뭇 진지한 눈을 하고 답했다.

     “다칠 수도 있어, 견습.”
     “대련에서의 부상으로 실전에서의 부상을 대체할 수 있다면, 하지 않을 이유는 없습니다.”

     정식 기사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는 기세로 피도란스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소년의 샛노란 눈에는 어쩐지 거절하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피도란스는 그 눈을 마주 보며 한동안 말이 없다가, 표정을 풀고 피식 웃으며 물었다.

     “견습, 이름이 뭐지?”
     “지우스입니다.”
     “...좋아, 지우스. 고작 대련 한 번으로 네 태도가 바뀌지 않기를 바랄게. 따라와.”

     피도란스는 나름 어른스러운 태도로 앞서 걸으면서도 묘하게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격기사 시험을 앞두고 있을 견습. 지우스가 기사가 되기 전부터 잘 가르쳐서 든든한 아군으로 만들어 놓는다면, 나중에 기사가 되었을 때 가장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동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련에서 확인한 지우스의 강함은 첫인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수준이었다. 적어도 피도란스가 느끼기에는 그랬다. 근력이 특출난 편은 아니고, 스피드 타입이라기에도 뭔가 애매하고... 그나마 눈에 띄는 점이 있다면, 동작 몇 개에 한정되지 않고 몸 전체를 활용하는 움직임에 꽤 능숙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전투 센스는 합격점이었다. 

     힘의 차이는 어쩔 수 없었지만. 몸 안쪽으로 파고들어 오는 지우스의 공격을 피도란스가 절도 있는 동작으로 막아내자, 오히려 공격한 지우스가 저 멀리 나가떨어졌다. 돌발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은 아직 좀 부족하고. 이제 체력도 슬슬 한계인 것 같은데... 자, 어쩔 테냐?

     지우스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눈빛은 여전히 처음과 같은 빛을 띤 채 피도란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도란스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아. 근성도 합격. 지우스가 후들거리는 다리로 겨우 중심을 잡자마자, 피도란스는 바로 그의 눈앞까지 달려들어 주먹을 내뻗었다. 살기가 제대로 담긴 공격이 지우스의 바로 눈앞에서 멈췄다. 그 여파로 일어난 바람이 둘의 주변을 시원하게 쓸고 지나갔다. 지우스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 부분에서는 피도란스도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담력은 이미 견습 수준을 아득히 초월했군.

     “오늘 대련은 여기까지. 고생했어.”

     피도란스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지우스의 무릎이 푹 꺾였다. 진작에 체력의 한계를 넘었던지, 한참 동안 거칠게 숨을 고르고도 진정되지 않았다. 피도란스가 지우스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전투 경험은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기본적으로 센스가 있어. 힘만 좀 더 기르면 격기사 시험은 너끈히 통과할 수 있을 거야.”
     “...감사합니다.”





     피도란스가 그를 다시 만난 건 2년이 흐른 뒤였다. 그 사이 지우스는 턱걸이로나마 격기사 시험에 합격했고, 꽤 특이하게도 동물이 아닌 신수의 이명을 받았다.

     “오랜만이야~ 지우스, 아니, 이젠 담청색 기린이라고 불러야겠네. 어때, 합격 소감은?”
     “나쁘지 않아. 생각한 것과는 좀 다르지만.”
     “...응?”
     “무슨 문제라도 있나?”
     “아~ 아니, 왠지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것 같아서.”

     키도 많이 큰 것 같고. 분명 2년 전에는 피도란스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야 했던 지우스가, 지금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눈썹만 살짝 위로 까딱하고 있었다. 어째 귀염성이 많이 사라진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런 건 원래부터 없었나?

     “이젠 당신에게 지도받던 견습이 아니니까.”

     지우스가 피도란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대답했다. 맞는 말이긴 했다. 이제 시험을 앞둔 견습이 아니라 같은 격기사 동료로서 대해야겠지. 근데, 그 말이 맞는데, 묘하게 섭섭한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피도란스가 오랜만에 만난 지인을 대할 때의 어색함을 차마 자연스럽게 무마하지 못한 채로 말을 이었다.

     “어, 격기사도 됐으니 그동안 얼마나 강해졌는지 궁금한걸? 오랜만에 대련이나 한번 할래?”
     “...아니. 지금의 나는 당신에게 도움이 안 돼.”
     “나한테는 꼭 도움이 되지 않아도 괜찮잖아? 그냥 네 실력 확인 겸 대련이지, 뭐.”
     “동료로서, 더 이상 내가 일방적으로 도움만 받는 관계를 지속할 수는 없어.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행동해야겠지. 그런 점에서 지금은...”

     이어진 지우스의 말은 꽤 놀라운 것들이었다. 기어스를 받고 나서 오히려 약해진 대신 특별한 능력이 생겼다는 이야기, 그 힘으로 하마터면 친구를 죽일 뻔했다는 이야기, 그 능력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기로 했다는 이야기... 진지한 태도로 지우스의 말을 끝까지 다 들은 피도란스가 물었다.

     “근데, 이 이야기를 나한테 해주는 이유가 뭐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이상한가?”
     “이상하지. 네 말대로라면 이 이야기는 너의 약점을 훤히 노출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잖아. 그런 걸 2년 만에 만난 사람한테 덥석 말해준다는 건...”
     “신뢰를 쌓기 위해서야. 나는 내 목숨을 믿고 맡길 수 있는 동료가 필요하거든.”
     “...너, 목숨을 맡길 동료를 너무 대충 고르는 거 아니야? 내가 믿을 수 없는 사람이면 어떡하려고.”
     “당신은 믿을 수 없는 사람인가?” 
     “그건 네 판단에 맡겨야겠지.”
     “그럼 믿을 수 있어. 내가 그렇게 봤으니까.”

     지우스의 샛노란 눈이 2년 전과 같은 눈빛으로 피도란스를 바라보았다. 피도란스가 잠시 지우스를 마주 보다가 그의 앞으로 한 손을 불쑥 내밀었다.

     “뭐, 나도 2년 전에 한 번 보고 널 골랐으니까. 딱히 할 말은 없네.”

     지우스는 피도란스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 순간 피도란스는 지우스가 희미하게 미소 짓는 것을 본 것도 같았다.





     승냥이, 승냥이... 피도란스, 괜찮아? 반복해서 부르는 기린의 목소리에, 피도란스는 눈을 떴다.

     “아... 얼마나 지났어?”
     “30분. 이제 다시 움직여야 해.”

     그 말을 하는 기린은 그게 세상에서 제일 하기 싫은 말이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피도란스가 아직도 전체적으로 따끔거리는 팔을 크게 휙휙 돌려서 몸을 풀었다. 몸을 감싸고 있는 붕대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며칠 전, 사방이 막힌 장소에서 적들의 공격을 받는 바람에 주변이 온통 불로 휩싸였다. 다행히 기린은 크게 다친 곳이 없었지만, 피도란스는 상반신 전체에 약한 화상을 입는 바람에 상처부위에 전부 붕대를 감아야만 했다.

     “돌아가서 제대로 된 치료를 받으면 좀 나아질 거야.”
     “아~ 아, 그 말 좀 그만 하라니까. 지금 중요한 건 남은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돌아가는 것 아니겠어? 그럼 걱정할 게 아니라 지시를 내려야지.”
     “...자기 몸 상태에 대해서도 신경을 좀 쓰도록 해.”
     “너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거든~”

     누구보다 자기 몸 신경 안 쓰는 녀석한테 말이야. 피도란스가 서글서글하게 웃는 표정을 한순간에 싹 지우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계획은?”
     “간단히 설명하지.”

     기린이 그새 뭘 또 정리해 놨는지 어디선가 종이를 꺼내 들었다.

     “...이상. 질문 있나?”

     피도란스가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잔불의 기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사들 현대au (8) + 공지  (0) 2024.04.17
    기린사슴  (0) 2024.04.12
    기린닭 인권유린상자  (0) 2024.04.09
    기사들 현대au (7)  (0) 2024.04.08
    기사들 현대au (6)  (0) 2024.04.07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