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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디루디
    잔불의 기사 2024. 7. 23. 21:42

     

     “7월 21일 일요일, 파디얀의 새벽 라디오입니다! 내일부터 다시 비가 온다고 하네요~ 무더운 날이지만, 에어컨 너무 많이 틀었다가는 냉방병 걸릴 수도 있으니까 여러분 모두 조심하세요. 옆에 계신 우리 막내 작가님도 지금 감기 걸리셨거든요~”

     루디카가 일부러 멀리 떨어진 곳에서 콜록거리다 말고 파디얀을 쏘아보았다. 이 감기가 누구한테 옮은 줄이나 알고 그런 말을. 파디얀은 마이크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진행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쪽을 쳐다보지는 않았지만, 루디카의 따가운 시선을 감지한 게 틀림없었다.

     “8158님이 ‘마침 제가 어제부터 목감기로 고생 중인데요, 그래도 라디오는 들으려고 따뜻한 유자차 한 잔 마시면서 듣고 있어요.’ ...라고 보내주셨네요. 어머~ 약은 챙겨 드셨나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빨리 나으셨으면 하네요! 그럼 광고 듣고 올게요.”

     광고가 나가는 도중에 파디얀이 물었다.

     “약은 먹었어?”
     “...아직.”
     “병원은?”
     “안 가도 돼...”

     뭘 이런 걸로 병원을 가, 시간 아깝게. 루디카의 무미건조한 대답에 파디얀이 괜히 입술을 삐죽였다. 항상 이런 식이지. 루디카는 예전부터 아파도 병원을 잘 안 갔다. 이유는 주로 시간이 없다는 게 다였다. 물론 병원에 안 가고 감기가 낫는다면 좋은 일이겠지. 하지만 굳이 약도 안 먹고 버티다가 감기가 더 심해지는 건 아닐까.

     이런 말을 해봤자 안 들을 게 뻔했다. 이 고집은 대체 누굴 닮은 걸까. 파디얀이 잔소리를 더 늘어놓는 대신 루디카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괜히 버티지 말고 내일은 병원 가.”

     나름 걱정 어린 충고에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루디카였다. 루디카가 대답 대신 손에 든 율무차를 후후 불어 마셨다. 코가 막혀서인지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원래 감기에 걸린 사람은 파디얀이었다. 덕분에 어제 방송은 약간 쉰 목소리로 진행되었고, 파디얀의 건강을 걱정하는 문자가 꽤 많이 왔었다. 이 감기가 죄 없는 루디카에게로 옮겨간 건 바로 어젯밤. 파디얀이 양손 가득 사 와서 스튜디오 전체에 한 잔씩 돌렸던 커피 때문이었다.

     루디카는 파디얀이 라디오를 진행하는 자리 바로 옆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둘의 커피도 나란히 놓여있었다. 둘 다 처음에는 자기 커피를 잘 찾아 마셨다. 하지만 방송 중간 즈음부터 루디카의 커피와 위치가 헷갈리면서, 파디얀은 어느새 루디카의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두 잔 다 똑같은 아메리카노라 루디카도 커피가 바뀐 줄 모르고 자연스럽게 파디얀의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것은 이미 다 마셔버린 후였다. 그나마 마지막에라도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건 파디얀이 항상 시럽을 넣는 반면, 루디카는 시럽을 넣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쩐지 그날따라 커피가 묘하게 달더라니. 루디카가 대본을 정리하면서 또 한 번 요란하게 기침을 했다. 왠지 방금보다 더 목이 부은 것 같았다. 이러다 더 심해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그리고 루디카가 아무렇지 않게 떠올린 그 생각은 다음 날부터 바로 현실이 되었다.





     라디오 막내 작가인 루디카의 하루는 늦게 시작해서 늦게 끝난다. 이 생활의 장점은 매일 늦잠 자고 오후에 출근해도 된다는 것. 단점은 방송이 다 끝난 늦은 새벽에 퇴근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새벽 2시에 방송이 끝나면 루디카는 그날의 마지막 업무를 위해 휴대폰을 집어 든다.

     루디카의 일 중 하나인 ‘파디얀의 새벽 라디오’ 공식 SNS 계정 관리. 그날그날 라디오에 출연한 게스트와 파디얀이 같이 찍은 사진이나 이번 주 방송 일정 등을 업로드한다. 가끔 팬 서비스 차원에서 파디얀의 잘 나온 셀카 등을 올리기도 한다. 덕분에 파디얀의 새벽 라디오 공식 계정은 같은 방송사의 모든 라디오 공식 계정 중 가장 많은 팔로워 수를 보유하고 있었다. 올라가는 사진은 보통 파디얀이 게스트와 같이 찍은 사진이었지만, 가끔 루디카와 같이 찍은 사진들도 있었다. 이 때문에 댓글들 사이에서는 미모의 막내 작가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 중이었다. 업로드만 하고 댓글을 전혀 안 읽는 루디카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파디얀도 어제 방송이 끝난 이후에 루디카 대신 새 글을 업로드하다가 처음 안 사실이었다.

     SNS에 가득한 사진을 쭉 내려보던 중에 루디카의 사진이 눈에 띄었다. 언젠가 파디얀이 루디카와 같이 찍었던 사진. 사진이 올라간 날짜를 보니 3월 초인데도 루디카의 옷은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얇아 보였다. 밤에는 추우니까 좀 따뜻하게 입고 다니라니까. 스텝 한 명이 계속 휴대폰만 쳐다보고 있던 파디얀을 톡톡 쳤다. 방송 시작 3분 전. 정신이 번쩍 든 파디얀이 얼른 대본을 집어 들고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벌써 이틀째. 루디카는 스튜디오에 나오지 않았다.





     “7월 23일 화요일! 파디얀의 새벽 라디오 함께하고 계시는데요~ 잠시 후 2부에서 화요일마다 돌아오는 고민 상담 코너 진행되니까 조금만 기다려주시고, 보내주신 사연들은 모두 익명 보장해드리니까 사연 많이 보내주세요. 문자 번호 #0321번으로 보내주시면 되고요. 짧은 문자 50원, 긴 문자는 100원이 추가됩니다. 그럼 노래 한 곡 듣고 올게요~”

     제목도 가수도 거의 처음 들어보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파디얀이 대본을 내려놓고 문자창을 눈으로 한 번 쓱 훑었다. 거의 비슷비슷한 내용의 문자들 사이에는 루디카의 이야기도 간간이 섞여 있었다. 파디얀이 문자를 읽는 사이에 노래는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3791님이 보내주셨습니다. ‘아프시다던 막내 작가님은 감기 나으셨나요?’ 아니요. 오늘 아파서 못 나오셨어요~ 지금 저희 막내 작가님을 걱정하는 문자가 폭주하고 있는데요, 작가님의 인기가 제 인기를 위협하고 있는 것 같네요. 여러분 이러기 있어요? 언제는 내가 제일 좋다며~?”

     1부는 청취자들의 사연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에 보통 무난하게 빨리 지나가 버린다. 또 한차례의 광고가 지나가고, 2부의 고민 상담 코너가 시작되었다. 파디얀이 짤막한 길이의 첫 번째 사연을 읽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짝사랑으로 고민 중인 한 직장인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같은 부서다 보니 마주칠 일은 많은데 어떻게 마음을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흔한 레퍼토리의 짝사랑 고민 사연이었다. 세상에 이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파디얀이 라디오를 진행하면서 연애 고민 사연을 받은 것만 해도 열 번이 훌쩍 넘었다. 이번엔 또 어떤 말을 해줘야 하나. 습관처럼 책상을 톡톡 두드리던 파디얀이 문득 커피를 떠올렸다. 루디카가 감기에 걸리게 된 원인. 파디얀이 스튜디오 전체에 한 잔씩 다 돌렸던 그 커피.

     “음~ 고전적인 방법이지만, 커피라도 한 잔 사주면서 이야기할 기회를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이 방법이 용기가 안 난다면 커피를 그분한테만 주는 게 아니라, 같은 부서 전체에 한 잔씩 돌리면서 슬쩍 주는 거죠. 그럼 티도 안 나고? 아~ 돈은 좀 쓰셔야겠죠. 그렇지만 사랑에 돈을 아까워해서야 되나요~?”

     처음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막막했지만 한번 시작하고 나니 그다음은 쉬웠다. 그동안의 디제이 경력으로 다져진 파디얀의 말빨과 순발력이 꽤 그럴듯한 말들을 술술 만들어냈다. 

     “그러다 조금 지나면 주위 사람들에게 커피를 한 잔씩 돌리면서 사연자분이 좋아하는 그분! 그분한테만 더 맛있는 커피를 사주는 거예요. 다른 사람들 다 아메리카노 사줄 때 그분한테만 1000원 더 비싼 카라멜 마끼아또를 사준다거나~?”

     그날 문자창에는 이런 문자도 올라왔다. ‘파디, 사실 연애 박사인 거죠? 진짜 천재 같아요!’

     ...정말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도 모를 흔하고 진부한 방법인데도. 파디얀은 쏟아지는 칭찬의 문자들을 대수롭지 않게 읽어 넘겼다.





     “막내 작가님 오늘도 안 오셨나요?”
     “오늘은 오신대요. 근데 차가 막혀서 방송 시작 전에 도착하기가 좀 힘드실 것 같다고...”

     감기는 다 나은 걸까. 파디얀이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면서 볼펜을 빙글빙글 돌렸다. 생방송 3분 전. 생방송 시작 몇 분 전은 아무리 방송 경력이 쌓여도 어느 정도는 늘 긴장되는 시간이다. 항상 옆자리에서 이것저것 챙겨주던 루디카의 자리가 비어 있으니 더더욱. 비어 있는 옆자리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다 보니 방금까지 잘만 돌리고 있던 볼펜이 손에서 미끄러졌다.

     아. 파디얀이 바닥에 떨어진 볼펜을 주우려고 몸을 숙였다가 일으켰다. 분명 숙이기 전에는 닫혀 있었던 문이 열려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거... 한 잔씩 가져가세요.”

     루디카가 양손에 커피를 가득 들고 있었다. 파디얀이 무의식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도로 앉았다. 방송 시작 1분 전. 자리를 옮기기엔 곤란한 시간이었다. 스태프들에게 커피를 한 잔씩 나눠주고 온 루디카가 조용히 자기 자리에 앉으면서 파디얀의 앞에도 커피를 한 잔 내려놓았다. 카라멜 마끼아또였다. 방송국 1층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보다 딱 1000원 더 비싸게 파는. 

     달짝지근한 시럽 냄새가 났다. 파디얀이 스태프들 몰래, 입술만 뻐끔뻐끔 움직여서 물었다.

     어제 방송 들었구나?

     루디카도 그에 맞춰 입모양으로만 답했다. 

     들었지.

     뚜껑에는 이번엔 헷갈리지 않겠다는 것인지 작게 ‘파디’라고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파디얀이 그걸 보고 웃음이 터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참던 파디얀이 방송 시작을 알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하마터면 오프닝 멘트를 할 타이밍을 놓칠 뻔했다. 

     “매일매일 쏟아지는 비 때문에 모두가 고생하고 있죠? 항상 물속에 있는 것처럼 눅눅하고, 괜히 찝찝해서 기분도 좋지 않고... 여름의 한복판을 지나고 있다는 게 체감되는 밤이네요. 청취자 여러분의 남은 여름이 건강하게 지나가길 바라며, 7월 24일 수요일, 여기는 파디얀의 새벽 라디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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