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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린닭 (기린 안나옴)
    잔불의 기사 2024. 7. 29. 16:38

     

     뭐 하나 진실한 게 없는 세상이다. 새까만 닭은 생각했다.

     기사들이 그렇게도 떠드는 명예, 맹세. 맹세는 특히, 제 손목을 걸고 하든, 제 모가지를 걸고 하든, 새까만 닭은 그들이 한번 한 맹세를 지키리라고는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다.

     단지 기대하지 않는 것과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은 명백히 다른 것이었기에. 그래서 맹세를 어긴 기사들을 사냥했다. 폐하, 제 목숨을 바쳐 맹세합니다. 폐하의 백성들을 이 한목숨 바쳐 지켜낼 것을! 한 발짝도 도망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맹세합니다. 맹세, 맹세. 손을 들어, 무기를 높이 치켜들고, 우렁찬 목소리로 하늘을 바라보며 외치는, 그 광기의 행렬 틈새로, 어느 날의 차분한 대화 한 조각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다음 ‘힘’은 내 허락 없이는 쓰지 않는 걸로.
     ...알겠다. 약속... 아니, 맹세하지.

     살면서 들어본 맹세 중에 가장 맹세 같지 않은 말이었다.





     오늘 새벽, 그가 죽었다. 담청색 기린. 사인은 높은 곳에서의 추락사. 기사라면 웬만한 높이에서 떨어져도 대비만 잘하면 살 수 있잖습니까. 그러니 아마 사고사보다는, 자살일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원인은 아마도 과로로 인한 스트레스. 이상입니다. 더 궁금한 것 있으신가요?

     아니. 새까만 닭은 자리를 떴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개죽음이었다. 숭고한 희생도 아니고, 영웅적인 죽음도 아니고, 세상이 기억하는 죽음도 아닌, 완벽하게 기사답지 않은 죽음이었다. 응당 기사라면 죽음까지도 명예로워야 하는 법인데. 자살? 웃기지도 않지.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사람들은 담청색 기린이라는 이름을 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너를 기억하겠지. 지키겠다던 맹세는 내팽개치고 죽음으로 도피한 개자식으로 기억하든, 평생 남 이용할 생각만 하던 음침한 녀석으로 기억하든, 그게 뭐든 간에, 기억나겠지. 안 하려고 해도.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더러웠다. 제 마음속에 들 수 있는 이는 한 명뿐이었다. 새까만 닭 와론. 그래서 그는 새까만 닭 와론으로서 살아가며, 새까만 닭 와론만을 마음에 품고. 그렇기에 남이 보면 오직 제 생각뿐인 사람으로 보이도록. 실상은 벗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서 차라리 저 자신을 죽여 버린 것이었지만. 아무튼, 그날을 기점으로 그는 와론이 이 세상에 계속 살아 있게 만들겠다고, 오직 와론만을 위해 살겠다고 맹세한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인간의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아무리 제 길만을 따라 걸어도 그 길 앞으로, 주변으로 누군가가 계속 끼어들었다. 그 누군가는 잠깐 스쳐 가는 인연일 때도 있고, 잠깐이나마 같이 걸어 주는 이도 있고, 기억에 남을 만큼 꽤 오래 걸을 때도 있었다. 담청색 기린은 가장 오랫동안 곁에서 함께 걸은 기사였다. 그는 늘 일행의 가장 뒤에서, 모두를 눈에 담으며 걸었다. 제 뒤에서 자신을 쫓아오며 다리를 옭아매는 존재는 돌아보지도 않고. 그리고 결국은 거기 얽매여 뒈져버렸다. 자기가 한 맹세도, 남이 한 맹세도 다 화려하게 깨 부숴버리면서.

     기사들은 맹세를 너무 쉽게 한다고 생각했는데(그 녀석은 특히). 어렵게 한 맹세라고 해서 딱히 지키기 쉬운 건 아니었나 보다. 그러니까, 뭐 하나 진실한 게 없는 세상이라고. 나 자신이 한 맹세조차도.

     새까만 닭은 그의 무덤에 술을 한 잔 뿌리는 걸로 추모를 마쳤다. 뒈진 것들끼리 건배, 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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