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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주와론
    잔불의 기사 2024. 8. 7. 16:16

     

     이건 진짜 머리 깨고 싶을 만큼 글이 안 써져서 뭐라도 써 보려고 시작한 이야기입니다. 누가 주인공일지도 아직 안 정했어요. 그냥 쓰다 보면 이 이야기에 가장 어울리는 누군가가 마법처럼 등장한다거나, 그래서 이야기의 주인공을 멋지게 꿰찬다거나 하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생각 중입니다. 세상에 이야기의 주인공이 누군지도 안 정해졌는데 냅다 시작하는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요. 그렇지만 이미 시작해버렸으니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읽어주십시오. 아무튼, 주인공 없는 이야기라도 일단 계속되어야 하기에 대충 무슨 문장이라도 말해보겠습니다.

     그는 죽었습니다.

     이 정도면 꽤 박력 있는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등장인물이 냅다 죽어버렸으니까요. 그러나 조금 곤란한 시작이기도 합니다. 기껏 누군가가 등장했는데 죽어버려서 더 이상 이야기를 진행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등장과 동시에 죽는 인물은 생각보다 세상에 많은 법입니다. 마치 죽는 모습 한 장면을 위해 출현했다는 듯이... 그러나 그게 주인공이라면, 확실히, 곤란하네요.

     어쨌든 그는 죽었습니다. 누가 아무리 곤란하든 간에 그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인은 관통상, 자세히 말하자면 나린기 ‘론누’에 의한 관통상. 

     아무튼, 주인공이 죽었으니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입니다.

     끝이어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고,

     주인공 없는 이야기는 죽은 이야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어떤 이가 주인공의 투구를 쓰고 주인공 행세를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쓰고, 그의 무기를 다루면서. 무대 위의 조명은 더 이상 비출 주인공이 없으니 새로 나타난 가짜 주인공이라도 비춰주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아주 희한한 이야기가 만들어졌습니다. 주인공은 등장하자마자 죽어버렸고, 웬 다른 사람이 주인공 행세를 하며 주인공의 스포트라이트를 빼앗아 가는, 그러나 항의할 이는 이미 죽어버려서 없고.

     배우에게 무슨 사정이 있건, 관객들은 그를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자, 명전.

     

     

     

     

     

    #136

     

    사이, 희미한 조명이 몇 그루의 나무들과 두 사람의 실루엣을 비춘다. 무대 한가운데에서, 한 사람은 바닥에 곧게 누워 있으며 한 사람은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고 있다. 곧 조명이 밝아지면서 그들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난다. 와론의 투구에서 내려온 붉은색 술이 바람에 가볍에 나부끼고 있다.

     

    와  론 : 묻잖아. 뭐냐고, 너.

    지우스 : (잠시 말없이 와론을 응시하다가) 담청... 색 기린, 지우스.

    와  론 : 장난하나...(짧게 코웃음친다)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니잖아.

    지우스 : (사이) 나는, 그런 걸 물어본 거야.

     

    지우스의 손이 부들부들 떨리며 와론의 손을 잡아 밀어낸다. 와론의 손은 천천히 밀려나지만, 와론 쪽에서 힘을 빼 준 모양새다. 지우스가 표정을 유지한 채, 비틀거리며 상반신을 일으킨다.

     

    (중략)

     

    와  론 : 솔직하게 말해야 신뢰가 간다고 했던가.

     

    지우스, 와론을 향해 살짝 눈짓한다. 와론을 중심으로 강렬한 붉은색 조명이 내리쬔다.

     

    와  론 : 그럼 한번 솔직하게 털어놔 볼까? (조금 더 단호한 목소리로) 기사 사냥의 진실.

    지우스 : (사이) 그래.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와론이 천천히 지우스에게서 돌아선다.

     

    와  론 : 글쎄... (뜸들이며) 나는 말이지...

     

    다음 순간, 붉은 조명이 와론의 투구를 비춘다.

     

    와  론 : 기사들의 적이거든.

    지우스 : 뭐?

     

    지우스의 뒤쪽으로 론누가 바람을 가르며 날아온다. 지우스는 창의 접근을 눈치챈 듯하지만, 무언가 반응을 하기엔 늦은 상황이다. 론누가 지우스에게 닿기 직전, 암전.

     

     

     

     

     

     와론은 그의 다음 장면이 힌셔를 습격하다가 기사들에게 제압되는 장면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우스와 무대 위에서 만날 일은 한동안 없을 것입니다. 그는 무대를 내려갑니다. 다시 무대 위로 불려 나오기 전까지, 무대 위에 있지 않은 동안은, 생명을 잃고 침잠해 있을 겁니다. 그게 캐릭터의 숙명이니까요.

     캐릭터의 숙명이라. 와론은 이 말을 곱씹어 봅니다. 그렇다면 등장하자마자 죽어버리는 것도 그런 역할을 부여받은 캐릭터의 숙명인가? 죽어버리기 위해 무대 위로 잠깐 끌어 올려지는 게? 와론은 어쩐지, 그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무대 위의 와론은 136번째 막에서만 잠시 얼굴을 비춘 그 일회성 단역을 사랑했으니까요. 와론은 그를 사랑하게 만들어진 캐릭터였고, 그에 대한 사랑이 와론을 이루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니까요.

     사실, 그 캐릭터는 이야기의 주인공조차 아닙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나견이잖아요. 제목이 ‘잔불의 기사’인 걸요. 그저 와론이라는 캐릭터의 눈으로 봤을 때만 주인공에 준하는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 뿐, 그는 작품 전체로 봤을 때는 일회성 엑스트라에 불과한 거예요. 그러니 다시는, 무대 위에서 와론과 만날 일도 없겠죠. 죽었다는 설정이니까요.

     와론은 그게 슬프다고 생각합니다. 무대 위에서 연기한 그 캐릭터와의 추억은 단지 대사 몇 마디가 다였는데. 두 사람 사이에 오갔을 수많은 추억을 아무리 암시하고 있다 해도, 무대 위에서 관객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 고작 그 대사 몇 마디와 장면 몇 개뿐인데.

     그러나 와론은 캐릭터이므로, 각본을 수정하고 무대를 제 마음대로 꾸밀 권한이 없습니다. 단지 무대 아래에서 죽은 듯이, 다음 출연을 기다리며, 혹시라도 이번 막에서는 그리운 당신과 함께 무대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 오직 그 생각만으로 버티는 것뿐이죠.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까요... 아, 막이 오를 시간입니다. 명전.

     

     

     

     

     

    #외전 3

     

    무대 위로 어두운 색의 조명이 내리쬔다. 와론은 조명을 제대로 받는 위치에 서 있고, 회백발 여자는 그 조명을 살짝 비껴간 곳에서 와론을 지켜 보고 있다. 여자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려 있다. 와론이 성큼성큼 무대 가장자리로 걸어가 여자의 손을 끌고 무대 가운데로 나온다.

     

    와  론 : 날씨 좋은걸.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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