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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냥기린
    잔불의 기사 2024. 8. 16. 11:18

    *유혈 묘사 있습니다

     

     

     피도란스는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제 눈을 통해 앞을 보고 있었지만, 그 시선의 방향은 전혀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니까, 의식만이 생생한 채로 자기 몸 안에 완벽하게 갇힌 상태였다. 그의 몸을 움직이는 강제적인 힘에 조금이라도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행히도, 피도란스의 몸을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는 당장 피도란스더러 미치광이처럼 날뛰며 동료들을 공격하게 시키지는 않았다. 일단은 상황을 지켜보면서 정보를 얻으려는 듯했다. 그러다 한 명씩 떨어졌을 때 공격하려는 거겠지. 아니, 생각해 보니 전혀 다행인 게 아니었다.

     피도란스는 바쁘게 머리를 굴렸다. 생각, 생각. 할 수 있는 게 생각뿐이었다. 그가 동료들을 공격하기 시작하면, 막을 수 있는 이는 누가 있지? 가장 먼저 떠오른 상대는 새까만 닭이었다. 그야, 닭이라면 혼자서도 어떻게든 피도란스를 제압할 수 있을 터였다. 그 과정에서 일을 더 크게 벌이지만 않는다면 다행이지만... 그리고 하늘색 너구리 다랑, 회적색 여우 루디카... 여기부터는 솔직히, 장담할 수 없었다. 가급적 모두가 모여 있을 때 뭐라도 신호를 보내야만 했다. 문제는 손가락 하나도 그의 뜻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었지만.

     “임무 종료. 이만 돌아가지.”

     지우스가 말했다. 지쳤지만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지우스의 뒤를 하나둘 따르는 동료들을 보며, 피도란스는 이런 타이밍에 모두 고생했다는 둥, 평소처럼 쾌활한 말 한마디를 덧붙이지 않는 자신을 동료들이 이상하게 여겨주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피도란스에게 찾아온 것은 동료가 아니라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웬 낯선 목소리뿐이었다.

     기린을 따라가.

     무력하게 그 명령에 따라 기계적으로 팔다리를 움직이면서, 피도란스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를 타겟으로 정했는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하필이면.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피도란스는 여전히 제 의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낯선 목소리의 명령을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차라리 의식도 잠든 상태였다면 모를까, 의식이 생생한데도 머릿속의 자그만 방에 갇힌 듯 나가지를 못하고 있으니 더 비참했다.

     피도란스는 지우스가 새벽까지 서류 작업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피도란스를 조종하는 위험한 적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모두가 잠들기를 기다려 지우스를 노리려는 것이겠지. 그걸 뻔히 예상하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전한 선택지는 단 하나, 피도란스가 정신력으로 조종을 뿌리치는 것뿐이었다. 피도란스는 머릿속의 작은 방에 갇힌 채, 문고리도 없는 문을 마구 두들기고 힘껏 밀어보았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피도란스는 그 작은 방에 흠집조차도 낼 수 없었다. 피도란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머릿속 목소리가 또 지시해 왔다.

     기린이 있는 곳으로 가, 얘기하러 왔다고 말해.

     피도란스는 그 명령에 따랐다. 지우스는 예상대로, 서류 작업 중이었다. 문틈으로 드러난 지우스의 얼굴에서 약간의 놀라움이 드러났다. 피도란스는 지금 제 표정이 완전한 무표정임을 알았다. 지우스라면, 기린이라면, 무언가 제발 이상함을 눈치채주리라―

     “무슨 일이지?”
     “잠깐 둘이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서.”

     피도란스의 입이 멋대로 움직여 말하는 동안, 지우스의 표정에서는 놀라움이 사라지고 진지한 빛을 띠었다. 아무래도, 피도란스가 심각한 이야기를 하러 왔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피도란스는 이를 꽉 악물고 싶은 기분으로, 부디 다음 지시가 내려오지 않기만을 빌었다.

     그를 죽여.

     너무도 당연한 전개였다. 피도란스의 손이 그 명령에 따르기 위해 움직였다.





     뻣뻣하게 움직이는 팔이 평소보다 미세하게 굼뜬 동작으로 대검을 휘두를 때마다, 피도란스는 머릿속 방 안에서 손이 터져나가도록 문을 두들기고 벽을 손톱으로 마구 긁어댔다. 벽에는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피도란스는 제 눈물샘에서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감지했다. 고작 그뿐이었다. 명령을 따르지 않고도 피도란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 제 정신력이라는 건 이렇게나 나약했던가.

     지우스의 모자는 벗겨져서 땅에 나뒹굴고 있었고, 늘 입고 다니던 후드티도 찢어져서 너덜거렸다. 처음 공격을 날릴 때 제대로 못 피해서 생긴 가슴팍의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피도란스의 손은 지우스를 죽이기 위해 최적의 루트로 움직였다. 지원을 부르지 못하게 한 손으로 거칠게 입을 틀어막고, 남은 손으로 마지막 일격을―

     날리기 직전, 머릿속 목소리가 다시 말했다.

     멈춰.

     그 즉시, 피도란스는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축 늘어졌다. 한 손은 여전히 지우스의 입을 헐겁게 막은 채였다. 지우스가 기진맥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승냥, 이... 괜찮...?”

     말을 할 수만 있었다면, 피도란스는 제 목숨이 꺼지기 일보 직전인데도 남에게 괜찮냐고 묻는 지우스의 정신머리에 대고 한마디 했을 것이다. 그러나 피도란스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축 늘어진 채로 눈물이 줄줄 흐르는 눈을 부릅뜨고 있는 것뿐이었고, 바로 옆의 허공에서 솟아나듯 누군가가 나타났다. 지우스가 꼼짝하지 않는 피도란스를 밀어내고 몸을 일으키기도 전에, 그 누군가는 지우스의 얼굴을 거세게 후려쳤다. 퍽, 하는 살벌한 소리가 피도란스의 심장을 마구 찢어놓았다.

     “역시 마지막은 직접 처리해야 재미있겠지.”

     위협적인 조종 능력만 아니라면, 그자는 별것 없는 적이었다. 어설프게 자세를 잡고 마구 후려치는 것만 봐도 전투 센스가 형편없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우스는 이미 피도란스를 상대하느라 체력이 다 빠진 상태였다. 피도란스의 대검 공격은 어떻게든 피할 수 있었던 지우스였지만, 탈진 상태에서 당하는 초보적인 구타에는 일방적으로 얻어맞을 수밖에 없었다.

     적이 뭐라고 혼자 계속 지껄이는 소리가 피도란스의 귀에 무심하게 들어왔다가 나갔다. 시야가 눈물로 가려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먹먹한 귀를 통해 들려오는 지우스의 거친 숨소리가 점점 희미해져 가는 것만 같아서 겁이 났다. 피도란스의 온전치 못한 시야 안에서, 지우스가 부들부들 떨리는 팔을 들어서 구타를 막아보려다 얼굴을 맞고 옆으로 힘없이 쓰러졌다.

     “지긋지긋한 놈, 이제 끝이다.”

     피도란스의 시야에는 이제 흐릿한 인영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무언가가 살을 뚫고 들어가는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한 번, 두 번, 세 번... 지우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약한 퍽, 소리와 함께 지우스가 피도란스의 얼굴 바로 옆으로 굴러왔다. 언제나처럼 빛나는 샛노란 눈동자가 이쪽을 보았다. 그리고 이내 눈꺼풀이 힘없이 닫히며 샛노란 눈동자가 자취를 감추고― 그 순간, 머릿속 방에 의식의 홍수가 밀어닥쳤다. 의식은 분노라는 물길을 타고 잠시도 멈출 수 없는 속도로 콸콸 쏟아져, 피도란스가 갇혀 있던 방을 순식간에 잠겨서 떠내려가게 했다. 방의 문과 사방의 벽, 안에 갇혀 있던 피도란스까지 한데 섞여 마구 범람했다. 물이 빠져나가기에는 시간이 꽤 걸렸다...

     물이 다 빠져나갔을 때, 피도란스는 자기가 줄곧 갇혀 있던 머릿속 방 밖에 서 있음을 알았다. 아니, 현실에서도 두 다리로 버티고 선 채였다. 손에는 여전히 대검이 들려 있었고, 후각이 비릿한 피 냄새를 감지했다. 그리고 시야에 들어온, 끈적하고 검붉은... 적의 피. 얼마나 난도질을 당했는지 확실히 죽은 것처럼 보이는 적 옆에, 지우스는 다리에 몇 번의 자상을 입은 채로 쓰러져 있었다.

     피도란스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단지 온몸이 상처투성이이고 다리에 출혈이 심할 뿐, 아직 희미하게 숨이 붙어 있는 지우스를 안아 들고 서둘러 밖으로 나섰다. 끔찍하게 난자당한 적의 시체를 뒤로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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