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불의 기사
-
기린닭 (닭 안나옴)잔불의 기사 2024. 3. 31. 14:01
그 기사가 제시간에 돌아오지 않는 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다. 그들은 새까만 닭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들은 기다림에 익숙하지 않다. 몇 걸음의 사이를 두고 오락가락한다. 나무 아래 그늘과 햇빛 사이를 빙글빙글 맴돈다. 누군가는 손톱을 물어뜯는다. 그것이 오롯이 걱정에서 나온 행동이 아님을, 지우스는 안다. 처음의 걱정은 약간의 분노로, 분노는 점차 사그라지면서 곧 의심으로, 불신으로, 들불처럼 번져 나갔으리라. 지금, 이들 사이에서 닭을 걱정하는 이는 거의 없었다. 의심하는 이는 있을지 몰라도. 그러니 그들이 걱정하는 건 닭의 생사가 아니라, 곧이어 닥쳐올 곤란한 상황― 한때 이쪽의 큰 전력이었던 동료를 적으로 마주하는, 그런 꺼림칙한 상황일 것이다. 지우스는 입을 열어 본다. 그답지 않게도, 입을 ..
-
승냥기린잔불의 기사 2024. 3. 29. 16:22
승냥이의 상태가 심상치 않음을 기린이 눈치챈 것은 거의 우연이었다. 매번 괜찮아, 괜찮아를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니 역으로 괜찮지 않으리라 예상은 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 안 괜찮을 줄은 몰랐는데... 기린이 이마를 짚었다. 아무리 정신없는 상황이었다지만, 동료의 상태가 이렇게 나쁜데도 눈치채지 못했다니. 이건 명백한 불찰― “네가 이렇게 된 건 내 불찰이고 능력 부족이다. 모두 내 책임이야―” “...장난칠 때가 아냐, 승냥이.” “꽤 비슷했다고 생각하는데, 나는. 어차피 저렇게 말할 생각 아니었어? 기린.” 본래의 색을 잃은 붕대가 바닥으로 하늘하늘 떨어졌다. 복부를 감고 있던 붕대를 풀어헤친 승냥이가 새로운 붕대를 집어 들었다. 고작 그 정도 움직였음에도 입가에서 흐르기 시작한 피는 승냥이의 부상이..
-
파디루디 현대au잔불의 기사 2024. 3. 29. 15:20
있지, 그때는 그런 시기였다. 사람과 사람 간 거리 유지가 필수인. 사실 어느 때건 사람들 사이에 그 정도 거리감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 중이었기에, 그건 문제가 없었다. 세상은 원래 그랬는데 역병이 돌고 나서야 모두가 알게 된 거지. 이렇게 우글우글 모여 사는 건 정상이 아니라고. 비정상이라고. 비정상 속에 갇히고 나서야 정상성을 인식하다니 역시 대가리들 성능하고는. “―사회 문제에 관심을 두게 하고, 그 분위기를 주도하여 현실을 개선하는 데―” 루디카는 카메라 아래로 교묘하게 턱을 괸 채 졸린 눈으로 화면을 응시했다. 조그만 화면 속 자신의 얼굴은 이목구비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만큼 흐렸다. 스카치테이프를 조금 뜯어 그 위로 손가락 지문을 한 번 찍은 뒤 노트북 카메라에 붙이면 그렇게 된다. 같..
-
기린닭잔불의 기사 2024. 3. 26. 13:01
딱 10분만 더 싸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지우스는 흐려져 가는 의식을 간신히 붙든 채로 생각했다. 원래 이 정도 부상이라면 아무리 기사라도 더 이상 싸울 수 없다. 지금 지우스가 후들거리는 두 다리로 서 있는 것만 해도 가공할 정신력을 바탕으로 한 기적이었다. 물론 고민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그 10분을 5분 이내로 줄이는 방법과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몸을 5분간 더 싸울 수 있게 만드는 방법. 둘 다 지우스의 손끝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지우스는 망설임 없이 손바닥을 마주쳤다. 사상 지평에는 상처를 치유하거나 지혈하는 능력이 전혀 없다. 그저 몸에 힘이 넘쳐나니 마취라도 된 것처럼 잠깐 고통을 잊고 싸울 수 있게 만들어줄 뿐. 그 5분간의 싸움은 오히려 부상 악화를 가속시키겠지만...
-
기린닭 담배잔불의 기사 2024. 3. 24. 22:04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이래서 별로다. 지우스는 한 손으로 바람을 막은 채 다른 한 손으로 연신 라이터를 켜댔다. 오늘따라 죽어라고 붙지 않는 불 때문에 벌써 몇 분째 담배를 입에만 물고 있었다. 괜히 옥상에 올라왔나. 하지만 내려가서 피우다가 사슴이나, 사슴, 혹은 사슴 같은 사람과 마주치면 귀찮게 잔소리나 들을 것 같았다. (직업병이야, 사슴. 네가 선생님이라고 해서 내가 네 학생은 아니잖아.) 기사급 신체 능력을 갖춘 자도 못 하는 게 바람 많이 부는 날 담배 불붙이기라니. 간신히 붙었나 싶었지만, 이번에도 끝부분만 살짝 타고 말았다. 사상 지평 번개로는 붙일 수 있나? 해보겠다는 건 아니고 그냥 궁금해서. “하...” 드디어 불을 붙이는 데 성공한 지우스가 담배 연기를 깊게 빨아들였다가 후, 하고..
-
파디루디잔불의 기사 2024. 3. 23. 19:09
겨우살이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무기의 조건. 그것은 ‘파디얀이 무기로 인식하는가’.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손에 쥔 순간, 그것이 별거 아닌 펜 한 자루라고 해도 거부반응은 예외 없이 나타난다. 기사란 아무리 하찮은 물건이라도 순식간에 흉악한 무기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이들이었기에. 결과적으로 파디얀이 무기로 여길 수 있는 건 자기 손발뿐이었는데― 이마저도 겨우살이가 보기에는 달갑지 않았던지, 겨우살이는 빠르게 파디얀의 생명력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래, 이 질투 많은 나린기 같으니라고. 그럼 원하는 대로 너만 무기로 여겨주마. 그렇게 생각하며 겨우살이를 처음 발동했던 날. 파디얀은 겨우살이가 자신에게 갖는 감정이 단순한 질투를 넘어, 혐오에 가깝다는 것을 알게 된다. 멀리서 겨우살이가 발동하는 광경을 보..
-
파디루디 동거잔불의 기사 2024. 3. 22. 20:06
1 “루디이~ 나 머리...” “말려줄게.” “아! 또 말 끊었어! 부탁하기도 전에 들어주는 게 어딨어?” “...싫어?” “아니~ 부탁하는 재미가 없잖아! 루디는 밀당을 모른다니까~” 파디얀은 그러면서도 아이처럼 맑게 웃으며 루디카의 앞에 등을 보이고 앉았다. 키가 큰 파디얀이었지만, 다리를 모아서 팔로 감은 채 쪼그리고 앉아 있으니 그 등이 꽤 작아 보였다. 그리고 그 뒷모습이 거의 안 보일 만큼 치렁치렁하게 내려온, 흰 사슴이라는 이명에 걸맞은 새하얀 머리카락. 루디카가 말없이 파디얀의 머리카락을 한 줌 손에 쥐었다. 방금 씻고 나온 파디얀의 축축한 머리카락이 루디카의 손끝을 부드럽게 간지럽혔다. 기분 좋은 느낌이었다. “다 하면 루디 머리도 말려 줄게~” “내 머리... 이미 다 말랐어. 짧으니까..